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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1894년 미국 북감리회의 의료선교<21>
1885~1894년 미국 북감리회의 의료선교<21>
  • 의사신문
  • 승인 2007.02.15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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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병원과 상동병원
알렌(H. N. Allen)을 비롯한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의료선교사들이 조선 정부가 설립한 제중원에서 의료활동을 벌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미국 북감리회 소속의 의료선교사들은 민간병원을 개설해 의료사업을 시작했다. 북감리회 의료사업의 개척자는 이화학당을 창설한 스크랜튼 여사((M. F. Scranton)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W. B. Scranton)이었다. 그는 본래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제중원에서 일했으나, 한 달 만에 이탈해 서민층 대상의 의료선교를 표방하며 민간병원 개원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정동에 있는 미국공사관 근처의 한옥을 매입해 1885년 9월 10일부터 진료활동을 시작했다. 병원 명칭은 `시병원(施病院)'이었다. 스크랜튼의 이름을 한자로 `시란돈(施蘭敦)'이라 표기했기에 머리글자인 `시(施)'자를 따서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수술까지 가능했던 제중원과는 달리 시병원은 외래환자 진료만 가능했다.

이듬해 6월 15일 마침내 시병원은 입원실을 갖춘, 명실상부한 병원으로 정식 개원했다. 본관 건물과 별도의 여성 전용 병동에 입원실을 마련함으로써 30명 가량의 남자 환자와 15명 정도의 여자 환자가 입원할 수 있게 되었다. 환자들은 대부분 조선인이었고, 일본인도 일부 있었다. 조선인 환자 대부분은 서민층이었다. 시병원은 극빈층 환자에게는 약값을 받지 않고 20푼의 진료비만 받았다.

1890년 가을 미국 북감리회는 남대문 부근에 또 하나의 진료소를 개설했다. 그 책임자는 맥길(W. B. McGill)이었다. 이듬해 10월 이 진료소는 입원실, 조제실, 환자 대기실 등을 갖춘 `상동병원'으로 확대되었다. 1894년에는 정동에 있던 시병원이 이곳 상동병원으로 이전 해 통합되었다. 시병원은 `양촌(洋村)'이라 불리던 정동 외국인 거주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터라 조선인들이 이용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보구녀관과 동대문 부인병원
1887년 10월 미국 북감리회 해외여성선교회는 여의사 메타 하워드(Meta Howard)를 조선에 파견했다. 그녀는 곧바로 이화학당 구내에 여성 전용 병원을 개설했는데, 민비(명성황후)가 이 병원에 `보구녀관(保救女館)'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 병원은 제중원의 부녀과와 함께 여성환자 진료의 개척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893년에는 동대문 부근에 보구녀관의 분원 격인 `볼드윈 시약소'가 문을 열었다. 1899년에는 보구녀관이 볼드윈 시약소로 이전 통합되어 `동대문 부인병원'으로 승격되었다.

북감리회 의료선교사업의 특징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미국 북감리회의 의료선교사업은 북장로회와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우선 북장로회는 조선 정부에서 설립한 제중원을 무대로 의료사업을 벌였으나, 북감리회는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민간병원을 운영했다. 둘째, 북장로회는 제중원에서 조선의 상류층부터 하층민까지 전 계층을 대상으로 진료했으나, 아무래도 무게 중심은 왕실이나 고위관료 등에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북감리회의 병원들은 하층민 진료에 치중했다. 셋째, 북장로회는 제중원 내에 부녀과를 두어 여성환자를 진료했으나, 북감리회는 보구녀관과 동대문병원 등 여성 전용 병원을 운영했다. 넷째, 제중원에서의 선교활동은 1894년 제중원이 미국 북장로회에 이관되면서 비로소 가능했지만, 북감리회의 병원들은 처음부터 민간병원으로 출발했기에 1890년경부터 의료활동과 선교활동을 병행할 수 있었다.
 

 

 

 


김상태 <서울대병원 병원사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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