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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이관 <20>
제중원 이관 <20>
  • 의사신문
  • 승인 2007.02.15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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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슨의 분노
1894년 4월 한 일본인 의사가 제중원의 주사들과 거래를 하고 세를 들었다. 작년 11월에 새로 제중원의 의사로 파견되어온 에비슨(O. R. Abison)이 마침 선교사 언더우드와 함께 지방으로 순회진료를 떠난 차였다.

그 방은 에비슨이 수술실로 쓰려고 준비해둔 것이었다. 돌아온 에비슨은 그동안 주사들이 보여온 `작태'에 참아왔던 분노를 터뜨리며 제중원과 연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주사들은 왕의 하사금을 중간에 가로채기 일쑤여서 약품비, 땔감 비용도 모자라는 등 제중원 운영은 난맥에 빠져 있었다.

정부 역시 1880년대 후반 이후 강화된 청의 개입으로 해관세와 같은 유력한 재원들마저 뜻대로 이용하지 못하면서 파견한 주사들에게 봉급도 제대로 지급을 못하던 형편이었다.

갑오개혁과 제중원의 향방
사퇴하겠다는 에비슨에게 조선정부가 약품비 지급 등 당면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했지만 에비슨은 병원이 왕에게 속해 있으니 왕과 연락을 담당할 관리 한 명 외에는 나머지 주사들은 돌려보내고 병원 `건물'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넘겨주면 선교부의 부담으로 운영하겠다는 안을 제안했다.

조선정부는 이를 거부했으며, 7월 말 청일전쟁이 시작되고 갑오개혁을 시작하면서 새로 구성한 내무아문에 위생국을 설치하고 외무아문에 소속했던 제중원도 내무아문에 이속시켰다.

조선정부가 한일공수동맹 체결로 억지로 전쟁에 끌려들어간 9월 초, 에비슨은 미국공사를 통해 이관을 다시 제안했다.

이어 일본군의 승리가 육지에서나 바다에서 확실시되어가던 9월 말 조선정부 측은 파격적인 승인의사를 전달했다.

조선정부 측 관리를 파견하지 않고 모든 사무 권한을 의사 에비슨에게 넘겨 운영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재정권 및 인사권을 포함한 운영권 전반의 이관은 사실상 정부병원의 성격을 상실하는 조처였다.

청일전쟁 당시 유력한 중재자로 떠오르던 미국에 대한 조선정부의 기대, 그리고 역시 미국의 중재를 바라며 조선정부의 의료개혁에 본격적인 개입을 원했던 일본정부의 묵인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1894년 이후의 제중원
제중원 설립 초기부터 선교부 측은 다소 이견은 있었지만 의사를 파견해 정부병원인 제중원과의 관계를 갖는 것이 왕과 유력 인물들의 관심을 유지하는데 좋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맺은 친밀한 관계는 국립병원이었던 제중원을 이관받아 실질적인 민간선교병원으로 변화시키는 바탕이 되었다.

이관 이후 제중원에서는 공공연히 아침예배를 비롯해 주중에는 기도회를 주일에는 정기예배를 열었고, 목사나 교인들이 제중원에 입원한 환자들을 찾아와 전도하는 것도 자연스런 광경이 되었다.

선교부에서는 병원을 새로 짓고 1905년 기존의 터와 건물들을 조선정부에게 환수했다. 이로써 정부와의 관계는 완전히 정리되고 새로운 병원도 세브란스기념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조선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에게 익숙한 제중원이란 이름을 애용했다. 

 

 이흥기 <서울대병원 병원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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