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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문을 열다 <9>
제중원 문을 열다 <9>
  • 의사신문
  • 승인 2006.11.01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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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혜원의 진료 개시

1885년 4월 3일, 통리아문에서는 서울의 4대문과 종각에 다음과 같은 방문을 붙이고 한성부로 하여금 동네마다 이 내용을 알리도록 했다. `본아문에서 시의원(施醫院) 한 곳을 북부 재동(齋洞) 외아문 북쪽 두번째 집에 설치하고 미국의사 알렌을 초빙하였으며 더불어 학도와 의약 및 여러 도구를 갖추었다. 오늘 18일부터 매일 미시(오전 8시경)부터 신시(오후 4시경)까지 병원을 열고 약을 제공할 것이다. 이 의사는 학술이 뛰어난데 특히 외과에 장점이 있어 한 번 진찰을 받으면 신효한 효과를 본다. 현재 본원에는 남녀가 기거할 방이 있으니 무릇 질병이 있는 자는 와서 치료를 받으라. 약값은 국가가 지급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렌이 실제로 진료를 개시한 것은 그로부터 한 주 가까이 지난 4월 9일부터였다.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꾼 이유는?

광혜원에서 진료가 개시된 지 보름 쯤 지난 뒤인 4월 26일, 외아문에서는 국왕에게 광혜원을 제중원(濟衆院) - 중생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뜻 - 으로 개명하자고 아뢰었다. 국왕이 이를 즉시 재가(裁可)함으로써 이 때부터 병원의 이름은 제중원이 되었다. 광혜원이나 제중원이나 그 뜻에는 별 차이가 없는데 굳이 이름을 바꾼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충청북도 음성군 한독의약박물관 부근에는 광혜원(廣惠院)이라는 지명(地名)이 남아 있는데, 이는 이태원(梨泰院)이나 홍제원(弘濟院)처럼 조선시대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국립 여관인 `원(院)'의 이름이었다. 서로 다른 기능을 하는 정부 기관이 같은 명칭을 갖는 것은 아무래도 곤란했을 것이다. 혹은 중국 원(元)나라대의 국가 의료기관 중 하나였던 광혜사(廣惠司)와 비슷한 이름을 피하고자 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원나라 때의 광혜사 역시 서역 - 아라비아 - 의사가 진료책임을 맡은 국가 병원이었다.

제중원의 운영 경비

제중원은 옛 혜민서와 활인서에서 행하던 대민의료, 또는 빈민구료 사업을 승계하였다. `공립의원규칙'은 `가족이나 따로 의지할 곳이 없는 환자'는 무료로 치료한다고 하였다. 비록 알렌이 무보수 의사로 근무했지만, 병원 운영 경비나 약값 또는 병원 내에서 사망한 무연고자의 장례비와 같은 지출을 피할 수는 없었다. 빈민에 대한 무료 치료를 위해서도 안정적인 재원은 꼭 필요했다. 처음 병원 경비는 예전에 혜민서와 활인서에 지급하던 돈과 포목, 쌀 등으로 충당했다.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제중원은 혜민서와 활인서를 잇는 기관이 된 셈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제중원의 경비를 다 충당할 수 없었다. 부족분은 따로 면세 토지를 지급하거나 개항장 객주로부터 받는 분세(分稅) - 물품 거래세의 일종 - 와 국자도고(麴子都賈) - 현대적 표현으로라면 누룩 전매상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 들로부터 받는 전매세를 제중원에 넘겨 주는 등의 방법으로 충당했다. 1887년부터는 개항장 감리서에서 객주들로부터 거두는 세금을 제중원의 운영경비로 하고 해관(海關)에서는 별도로 알렌에게 월급 - 당시에는 월급을 신수비(薪水費 ; 물과 땔감 값이라는 뜻)로 표현했다 - 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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