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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과 군의(軍醫) <19>
청일전쟁과 군의(軍醫) <19>
  • 의사신문
  • 승인 2007.01.31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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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땅 남의 싸움 1894년 내정 개혁을 요구하는 동학 농민군의 기세가 삼남지역을 휩쓸었다. 당황한 조선정부가 원병을 요청하자 청군이 6월 초 아산만에 상륙해 진압을 시작했다. 일본은 자국공사관과 거류민을 보호한답시고 거대 병력을 출병시켰다.

조선 정부와 농민군과의 화약(和約)이 성립되어 외국군의 주둔 명분은 사라진 시점이었다.

그래도 일본군은 아직 난이 평정되지 않았다거나 내정 개혁을 돕겠다며 철병을 거부하다가 7월 23일 경복궁을 침입해 쿠데타로 친일정권을 세우고 이틀 뒤엔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해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문명' 과시의 도구 `근대의료' 일본은 이 전쟁을 `문명 대 비문명'의 대결로 대내외에 선전했다. 일본육지측량부가 촬영한 사진을 보자. 널판으로 만든 임시 병상에 누워 퀭한 눈으로 렌즈를 쳐다보는 청군 포로, 처마 밑에 초라하게 앉은 청군 포로들의 모습이 당당하게 서서 치료를 베푸는 일본군 의료진과 무척이나 대비된다. 왼편 가에 선 두 명의 일본군 장교들은 왼쪽 팔에 `적십자'로 보이는 완장을 차고 있다.

이 사진은 1894년 12월 29일 발간된 프랑스의 `륄뤼스트라숑'에 목판화로 게재되었다. 일본 정부는 국제법을 준수하며 포로에게 자선을 베푸는 동아시아의 패자(覇者), 문명국으로서의 일본의 모습이 유럽인들에게 비춰지길 바랐으리라.

일본군은 이 전쟁에서 살상하는 기술에서건 치료하는 기술에서건 모두 상당한 수준을 드러내었다.

일본에선 명치유신 전후 내전 과정에서 서양의술을 수용한 `난의(蘭醫)'들이 군진의료 부문에 정착했고, 1871년에는 중앙에 군의료(軍醫寮)를, 각지에 병단병원(兵團病院)과 양생소(養生所), 둔영의국(屯營醫局) 등을 마련했다. 이듬해에는 `군의학사(軍醫學舍)'를 설치해 정책적으로 군의 양성을 개시했다. 나아가 동경대 의학부에서 최고수준의 의학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특수한 군진의료 관련 교육을 보충한 뒤 군의로 임용하는 길을 열었다.

조선의 선택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훈련도감과 어영청, 금위영에 각각 침의(鍼醫) 1명, 약방(藥房) 1명, 마의(馬醫) 1명 등 3명씩, 용호영에 마의 2명을 배치한 기록이 있다. 비록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대 전란을 겪은 뒤였지만 중앙군에 배치된 의료인력의 수는 매우 왜소했다.

청일전쟁은 조선인들이 경험한 최초의 본격적인 근대전쟁이었다. 비록 일본의 입김이 강해진 상태였지만, 1894년 7월 30일 조선정부가 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휘하에 `의무국(醫務局)'을 설치한 것은 강병(强兵)에 매우 효과적인 서양근대의학을 조직적으로 도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열강 속에서 독립을 유지하면서 우수한 기술을 도입해야 하는 과제, 조선 정부는 어떻게 풀어갔을까? 
 

 
이흥기 <서울대병원 병원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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