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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위기에 빠지다 <18>
제중원, 위기에 빠지다 <18>
  • 의사신문
  • 승인 2007.01.22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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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론의 단독 운영 1887년 7월부터 헤론이 제중원을 단독 운영하게 되었다. 그는 알렌에 비해 상대적으로 직접선교를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조선 정부는 천주교측의 명동성당 건립 강행에 자극받아 기독교 선교 금지 조치를 취했다. 이에 헤론은 조선 정부와의 충돌을 우려해 제중원 의료사업에 전념했다. 이로써 1890년 중반까지만 해도 제중원은 비교적 무난하게 운영되었다.

`구원투수' 하디 1890년 7월 헤론이 이질로 세상을 떠나면서 제중원에 위기가 찾아왔다. 제중원에 의사가 단 한 명도 없게 된 것이다. 이때 알렌이 제중원 복귀를 시도했다. 언더우드, 모펫(S. A. Moffet), 헤론 부인 등 조선 주재 북장로회 선교진영은 알렌의 외교관 신분을 문제 삼아 이를 가로막았다. 북장로회 선교부는 헤론 후임자 파견에 소극적이었다. 재정상의 부담도 컸지만, 조선 주재 선교사들의 불화에 실망하고 있던 터였다.

헤론의 후임자 문제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천주교, 성공회는 물론 일본인들까지 제중원 진료권의 인수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때 하디(R. A. Hardie)가 `구원투수'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1865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토론토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이 대학 YMCA 선교사로 조선에 건너와 활동 중이었다. 그는 1890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제중원 의사로 일했다. 훗날 미국 남감리회의 선교사가 되어 협성신학교 교장, 기독신보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빈튼과 조선 정부의 충돌 1891년 4월 3일 북장로회 소속의 의료선교사 빈튼(C. C. Vinton)이 제중원의 진료 책임자로 부임했다. 북장로회 입장에서는 정상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도 잠시뿐이었다. 빈튼의 부임 직후부터 제중원 운영과 관련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5월 11일 빈튼은 제중원 운영비 사용 권한을 요구하며 진료를 거부했다. 제중원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6월 27일 외아문 독판(오늘날의 외교통상부 장관) 민종묵은 미국 공사 허드(Augustine Heard)에게 공문을 보냈다. 그는 `제중원은 본디 국가에서 설치한 것이므로 함부로 그 운영 원칙을 바꿀 수 없다'고 전제하고, 빈튼이 일할 뜻이 없다면 면직시키고 다른 의사를 고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강력히 항의했다. 허드 공사가 빈튼의 요구는 약품 구입에 한하는 것이었다고 해명하고, 빈튼이 근무를 시작함으로써 이 문제는 진정되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1890년대 초반 조선에서는 사실상 선교활동이 가능했다. 그런데 유독 제중원에서는 선교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빈튼은 의료사업보다는 직접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선교사였고, `근본주의' 성향이 강했던 모펫이 그와 뜻을 같이 했다. 마침내 빈튼은 제중원 구내에 교회 설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에 의해 좌절되자, 오후에만 진료를 보든가 혹은 비가 오면 아예 병원 문을 열지 않는 등 `태업'을 시작했다. 1891년 9월부터는 별도의 개인 진료소를 차려 환자들에게 전도활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빈튼에 대한 조선 정부의 시선이 고울 리 만무했다. 조선 정부가 그에게 약을 공급해주지 않아 제중원이 큰 곤란을 겪는 일도 있었다. 결국 제중원은 빈튼 단계에서 병원으로서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893년 11월 에비슨이 부임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김상태 <서울대병원 병원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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