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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교육에서 교육병원의 역할 <17>
의학교육에서 교육병원의 역할 <17>
  • 의사신문
  • 승인 2007.01.2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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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기관으로서 정체성 조속 회복해야

Flexner 보고서가 발표되어 의학교육이 일대 개혁되기 전까지 미국의 의학교육은 거의 전적으로 강의 위주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에는 대학부속병원이란 것이 없었고 당연히 교육병원, 수련병원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다. 개원의들로 구성된 교수가 주로 야간 강의를 하고 학생들은 가끔씩 교수의 병원에서 일을 거들며 의학기술을 익히는 도제식 교육이 19세기 미국 의학교육의 전형적 모습이었다. 1889년에 문을 연 Johns Hopkins 병원은 이러한 구시대적 의학교육을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로 전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병원 개원 4년 후인 1893년에 설립된 Johns Hopkins 의과대학은 의과대학 입학자격을 획기적으로 강화하였고 의과대학 전임교수제도를 도입하였다. 유럽에서 의학교육을 받은 교수들이 2년간 기초의학교육을 실시하였고 그 후 2년간 임상교육 과정이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병원과 의과대학 간의 상호협정을 통해 2년간의 임상실습교육, 즉 bedside teaching을 도입하였다. 또한 교육병원은 의과대학 졸업생들에게 인턴 및 레지던트 수련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최초로 졸업 후 의학교육이 시작될 수 있었다. 이후 100년간 교육병원은 의학교육의 중심으로서, 과학적 의학의 산실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이제 교육병원은 의학교육에서 현장 실습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성인학습에서 현장 실습의 효과와 중요성은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된 바 있다. 한 예로 Godden과 Baddeley는 영국 해군 잠수병들을 대상으로 흥미있는 실험을 하였다. 그들은 잠수병들에게 수 십개의 단어를 주고 절반은 물 속에 잠수한 상태에서 그 단어들을 외우게 했고, 나머지 절반은 물 밖에서 같은 단어들을 외우게 하였다. 그리고 각 집단을 다시 나누어서 절반은 물 속에서, 절반은 물 밖에서 이전에 외운 내용을 기억해 내게 하였다. 즉 잠수병들을, 잠수해서 외우고 잠수해서 기억해 낸 집단, 잠수해서 외우고 뭍에서 기억해 낸 집단, 뭍에서 외우고 잠수해서 기억해 낸 집단, 그리고 뭍에서 외우고 뭍에서 기억해 낸 집단의 4종류로 분류한 것이다. 이때 단어를 외운 장소와 기억해 낸 장소가 같은 경우, 즉 잠수해서 외우고 잠수해서 기억해 낸 집단과 뭍에서 외우고 뭍에서 기억해 낸 집단의 기억률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높았다. 이 실험은 학습에서 환경의 영향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 준 실험이며 특히 의학교육에 시사하는 바가 큰, 매우 중요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환자와 대면통해 학습동기 극대화를

의과대학생들이 강의실에서 배운 임상적 지식을 실제 병원에서 환자의 문제를 해결할 때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데, 이는 학습이 일어난 환경과 이를 회상하고 활용하는 환경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학교육은 가능한 한 강의실보다는 실제 환자가 있는 교육병원에서 실시하여야 한다. 환자와 직접 대면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학습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학습동기와 흥미를 극대화시키는 방법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많은 의과대학에서는 강의를 최소화하고 교육병원에서의 임상실습을 더욱 늘리는 방향으로 교육과정을 개혁하는 것이다. 또한 PBL, 즉 문제바탕학습법도 실제 병원현장에서 벌어지는 것과 유사한 가상 상황에서 의학교육을 실시하려는 시도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교육병원은 의학교육의 중심으로서 제 기능을 다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3차 병원인 교육병원과 1·2차 병원 사이의 연계가 없기 때문에 학생들이 일차 진료의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술기를 배울 기회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사실상 우리나라의 모든 의과대학이 일차 진료의사 양성을 교육목표로 표방하고 있으며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일차 진료의 확대는 전 세계 의료계의 화두이기도 하다. 때문에 외국의 의과대학은 학생들의 임상실습을 대학병원과 연계된 지역 1차 의료기관에서 시행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고 실제로 일차의료기관이 학생교육에서 담당하는 역할이 점차 증대되고 있다. 이를 위해 의과대학은 각 지역병원이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낼 수 있도록 지역병원 의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수개발(faculty development)에 힘쓰고 있고 교육자로서의 대우를 충분히 해주고 있다. 또한 학생들의 교육과 평가에 필요한 각종 교육 자료와 평가도구를 제공하며 교육의 질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 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대학병원과 지역사회 병원이 의과대학생의 교육을 목적으로 유기적인 협력을 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고 따라서 거의 모든 학생실습이 3차 기관인 대학병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일차 의료기관에서 임상실습을 한다 하더라도 교육의 질을 담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개원가 학생교육 담당역할 증대 필요

둘째, 교육병원에서 의학교육, 특히 임상실습을 위한 체계적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학생들이 기회적 학습(opportunistic learning)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순환기 내과 임상실습을 하는 학생들에게 일차 진료의사로서 반드시 알아야할 순환기 내과 질병을 경험하고 관련된 술기를 익혀야 한다. 만일 자신이 실습을 하는 병원이나 실습 기간 중 해당 질병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면 다른 시간, 다른 병원에서라도 반드시 경험을 해야만 할 것이다. 외국의 경우 임상실습기관을 여러 군데 지정하고 `술기 바탕 교육과정(performance-based curriculum)'이라 하여 의학교육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핵심지식과 핵심술기의 목록을 제공하여 이를 반드시 경험하고 확인받게 하는 시도들은 모두 기회적 학습을 최소화하고 체계적 학습(systemic learning)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우리나라의 의료문화와도 관련 있는 문제겠지만 환자들이 교육병원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병원 측도 이에 대한 홍보 혹은 환자 설득이 미흡하여 학생들이 심리적 부담 없이, 적극적으로 환자를 보기 힘든 경우가 많다.

환자들은 실습 학생들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기를 거부하고 학생들은 자신이 실습학생임을 숨기거나 잔뜩 위축된 채 소극적인 실습에 그치는 경우도 많다. 실습을 담당하고 있는 교수나 전공의들도 환자가 반발할 것에 대한 부담감이나 학생들에 대한 불신감, 혹은 효율적인 진료 등의 이유로 실습학생들에게 단순한 관찰자로 머물러 있기만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임상실습을 나온 많은 학생들이 스스로를 “걸어 다니는 하얀 물체(white walking object)”라고 자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넷째, 교육병원에서 실질적으로 학생교육을 담당하는 전공의들에게 교육자로서의 기본적 능력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

학생 실습교육의 책임자, 관리자는 물론 교수이지만 현실적으로 학생교육의 80% 이상은 전공의들이 맡고 있다. 따라서 외국에서는 전공의들을 교육자로서 개발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Residents as a Teacher'). 예컨대 미국에서는 전공의 과정 중 기본적인 교육학 지식을 가르치고, 의학교육 워크숍 참여를 의무화하며, 발표법, 질문법, 효과적인 임상실습 지도 요령 등을 숙지시킨다. 영국에서도 학생 지도 방법, 평가방법, 문제 학생 상담 방법 등의 교육을 전공의에게 시켜서 그들이 훌륭한 튜터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술기바탕 체계적 학습 보장 바람직

마지막으로 현재 우리나라 교육병원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교육병원의 의사들이 미래의 의사들인 학생들에게 좋은 롤 모델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교육병원이 경영효율을 최우선적 과제로 삼다보니 의사로서 갖추어야 할 전문가적 품행(professional conduct)과 어긋나는 비교육적 행위들이 빈번히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다.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의학교육이 단순한 의학적 지식과 술기 전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감수성, 전문가로서의 품성, 리더십 등도 함께 개발시켜 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교육병원은 이러한 병원의 보이지 않는 문화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이상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대학병원은 의학교육의 중심이면서도 이제까지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의 대부분은 외적인 환경에 기인하기 보다는 교육병원이 교육을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가장 중요한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다(The main thing is to make sure that the main thing is the main thing)”라는 리 아이아코카(Lee Iacocca)의 말처럼 교육병원은 교육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하루 속히 회복하여야 한다.







임기영 <아주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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