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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의료진의 내부 갈등 <17>
제중원 의료진의 내부 갈등 <17>
  • 의사신문
  • 승인 2007.01.1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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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 대 스크랜튼(1885.5∼6) 1885년 4월 제중원 개원 당시 의사는 알렌뿐이었고, 한 달 후 미국 감리교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튼이 합류했다. 그런데 알렌과 스크랜튼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알렌이 조선 정부의 인정을 받아 제중원을 개원하고 직접선교보다 의료사업 중심의 간접선교에 치중하는 데 대해 스크랜튼은 비판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조선의 하층민을 대상으로 의료활동과 직접선교를 병행하는 데 강조점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교파 의식'도 강한 나머지 감리교 소속인 자신이 북장로교측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기관에서 근무하는 것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결국 스크랜튼은 조선 정부와 북장로교에 대해 감리교 의료선교사업의 독자성을 추구하고자 한 달 만에 제중원과 알렌을 등지고 말았다.

알렌 대 헤론(1885.6∼12) 북장로교 소속의 의료선교사 헤론이 곧바로 제중원에 합류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알렌과 헤론은 견원지간이 되고 말았다. 어쩌면 두 사람의 갈등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헤론의 입장에서는 알렌이 선배가 아니라 후배였기 때문이다. 헤론은 알렌보다 두 살 위였고, 의사로서의 실력도 한 수 위였다. 1884년 4월에 이미 미국 북장로교의 조선 파견 의료선교사로 임명된 만큼 `정통성' 면에서도 알렌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런데도 알렌은 제중원 운영에 대해 헤론을 철저히 배제시켰다. 헤론은 알렌의 허락 없이는 제중원 경비를 단 한 푼도 쓸 수 없었다. 게다가 직접선교에 대한 소명의식이 매우 강했던 헤론은 조선 정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의료사업에만 치중하는 알렌을 종교적 열정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헤론은 알렌의 일거수일투족을 물고 늘어지는 한편 선교본부에 편지를 보내 알렌을 비방하기 시작했다. 이에 질려버린 알렌은 선교본부에 부산 전임(轉任)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태에 대해 선교본부는 알렌과 헤론 모두 제중원에서 근무하도록 결정하고, 조선선교사공의회 회장에 알렌을 임명해 알렌의 주도권을 인정했다.

알렌 대 헤론·언더우드 (1886.1∼1887.7) 1886년에 접어들면서 제중원 의료선교진의 내부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우선 알렌의 독단적 운영이 더욱 심해졌다. 예컨대 제중원 이전이라는 중대한 문제조차 헤론에게 단 한마디도 상의하지 않았다. 알렌에 대한 헤론의 반감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중원 약제사였던 언더우드도 헤론편에 가세했다. 그는 당시만 해도 미국 북장로교에서 조선에 파견한 유일한 목사 선교사였다. 따라서 조선인 신자들을 확보하고 교회를 세우며 기독교 선교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 궁극적인 사명이었다. 의료사업 중심의 간접선교에 치중하는 알렌과는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는 당시에 조선의 고관으로부터 왕립학교 설립계획을 의뢰받고 무척 고무되어 있었다. 그런데 왕립학교 계획은 어찌된 영문인지 제중원의학당 설립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그는 이에 대해 알렌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는 선교본부에 편지를 보내 알렌을 노골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고, 선교본부가 알렌 지지 입장을 바꾸지 않자 사실상의 감리교 이적(移籍)을 요청하며 배수진을 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제중원 의료진의 내분 사태는 알렌이 자진해서 외교관으로 변신해 주미 조선공사관으로 떠남으로써 겨우 진정되었다.







김상태 <서울대병원 병원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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