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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1890년 제중원 의사들 <16>
1885~1890년 제중원 의사들 <16>
  • 의사신문
  • 승인 2007.01.08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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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H. N. Allen) 제중원 의사 하면 단박에 떠오르는 인물이 알렌이다. 조선 정부와 함께 제중원 개원을 주도했고, 초창기 2년 동안 제중원의 진료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1858년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서 태어났다. 1883년 신시내티의 마이애미의대를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그 해 10월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의료선교사로 중국에 건너가 난징과 상하이에서 의사로 일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반(反)기독교 정서로 말미암아 실적이 신통치 않았고, 폭행까지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빚도 많은 편이었다. 그러던 중 동료들로부터 조선에서 서양인들을 상대로 개업하면 돈벌이가 될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는 북장로회 선교부가 허락하지 않으면 개인 자격으로라도 조선에 가겠다고 결심했다. 다행히도 1884년 7월 선교부는 조선에서의 의료활동을 허락했다.

마침내 1884년 9월 알렌은 조선에 도착했다. 서양인 의사가 없어 곤란을 겪고 있던 미국공사관은 그를 공의(公醫)로 임명했다. 또한 조선인들은 중국인들과 달리 서양인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따라서 그의 조선 정착은 비교적 순탄했다. 게다가 12월 갑신정변 당시 조선의 실력자 민영익의 생명을 구함으로써 고종과 민비의 신임을 얻게 되어 제중원 개원을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1887년 헤론과의 불화로 제중원을 나와 외교관으로 변신했다.

언더우드(H. G. Underwood) 언더우드 목사, 그는 한국 장로교의 `대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도 제중원과 인연이 있다. 그는 185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1872년 미국으로 이주해 성장했다.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했고, 1884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미국 북장로회의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85년 4월 조선에 도착한 후, 제중원에서 두 달 동안 간단한 의료업무를 맡아 알렌을 도왔다. 이듬해 제중원의학당이 문을 열자, 그는 이 학당에서 의학도들에게 영어와 물리를 가르쳤다. 그는 이 무렵 새문안교회와 오늘날의 경신중고등학교를, 훗날에는 연세대학교를 설립했다.

스크랜튼(W. B. Scranton) 이화학당 설립자 스크랜튼 부인(M. F. Scranton)의 아들인 스크랜튼도 잠시나마 제중원에서 의료활동을 벌였다. 그는 1856년 미국 코네티컷 주의 뉴헤븐에서 태어났다.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대에서 수학한 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병원을 개업했다. 1884년 미국 감리회의 의료선교사로 임명되어 이듬해 5월 조선에 도착했다. 그는 제중원에서 약 한 달 동안 알렌과 함께 일했는데, 주로 환자의 마취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제중원을 나와 개인 진료소를 차리고 감리교의 의료선교를 주도했다. 이어서 상동병원과 상동교회를 설립했고, 훗날 대한의원의 교관을 담당했다.

헤론(J. W. Heron) 스크랜튼의 후임으로 헤론이 제중원 의사로 부임했다. 그는 1856년 영국에서 태어나 1870년 미국 테네시주의 녹스빌로 이주했다. 1883년 테네시의대를 수석 졸업하고, 18개월 동안 개업의로 활동했다. 1884년 4월 미국 북장로회의 조선 파견 선교의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듬해 6월이 되어서야 조선에 도착했다. 결국 뜻하지 않게 알렌의 후배가 된 셈이다. 알렌과 헤론의 불화는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







김상태 <서울대병원 병원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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