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17:41 (토)
'배워갈 수 있는 의사인격' 시스템 신선 <15>
'배워갈 수 있는 의사인격' 시스템 신선 <15>
  • 의사신문
  • 승인 2007.01.08 10: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일에는 인간중심 교육을 하는 의과대학도 있다

모 텔레비전 방송국의 프로그램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사실들을 발굴하여 우리의 상상력을 통하여 그 존재의 진위에 대해 확인해나가는 오락프로그램이 있다. 환자를 보고 의과대학 학생의 교육에 관여하는 일을 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인간중심의 의학교육이라는 주어진 타이틀을 몰랐다고 가정하고, 이런 대학은 과연 어떤 대학일까 하고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본다.

#통합커리큘럼으로 취향·재능발휘 초점

우선 기존의 의과대학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대학일 것이고, 커리큘럼이나 설립이념도 뭔가 틀린 획기적인 교육기관이 아닐까?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지식을 쌓아가며 모든 배움과 수련의 과정에는 인간애라는 것이 바탕하고 있는… 거기에 의학뿐만이 아니라 문학과 예술적 소양까지 함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렇다. 독일의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 주에 위치한 빗텐헤르데케(Witten/Herdecke) 의과대학이 추구하는 것이 그러하다.

빗텐헤르데케 대학은 독일 최초의 사립의과대학으로 1982년에 정부의 인가를 받은 소위 신설대학이다. 이 학교의 설립이념은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진 인지학(人智學, Anthrophosophy)을 기본정신으로 한 대안학교인 발도르프(Waldorf) 학교의 연장선에 있다.

인지학이란, 말 그대로 인간에 대한 앎(지혜)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본질, 존재의 의미 등과 같은 인간의 내면적 통찰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지식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자연과학이 이루어낸 업적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지만 물질이나 육체로서의 인간 이상의 것이 인간에게는 있으며 더 나아가 모든 생명체에서는 삶 자체에서 나오는 창조력과 의지가 현실과 조화를 이루어 가고 있다는 세계관이 그 바탕이다.

1919년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최초의 발도르프 학교를 세웠는데, 여기서는 기존의 전통적인 수직적 학교체제와는 달리 사회계층, 신분, 재능, 미래의 직업 등과는 관계없이 어린 학생들이 공동의 교육을 받게 되고, 아이들의 인간발달단계에 맞추어 개개인의 정신과 영혼의 바탕과 능력을 폭 넓게 고려한 교과과정이 이루어졌다.

생명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자연과 인간과의 하모니를 어릴 때부터 체험하게 하는 교육은 자연히 환경친화적이고 예술적 소양을 계발하는 것을 중시한다. 빗텐헤르데케 대학은 이러한 철학적 바탕에서 세워진 대안적 대학교육기관으로, 대학도 스스로가 자신의 취향과 재능을 발휘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곳이라고 이해한다.

독일에서는 모든 대학이 국가에서 재정과 운영을 관할하는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대학의 설립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매스컴과 학계에서는 거의 모두 신선한 충격으로 놀라움과 기대감 속에서 설립을 환영하였다고 한다.

#자유·책임바탕 기존 지식전달방식 거부

이 곳의 몇 가지 특징적인 의과대학 교육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기본적으로 여기서는 의학을 인간(환자 및 동료)의 요구를 참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 것을 해결하기 위한 문제로 이해한다. 이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일 할 수 있는 용기와, 함께 이루어 나가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한 에피소드로, 이 곳 병원에서는 환자가 도움을 요청하면 그 것이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의사가 간호사나 다른 사람에게 일을 미루지 않고 직접 그 자리에서 해결해주더라 라고 다른 병원의 간호사들이 부러워 말하는 것을 필자는 들은 적이 있다.

이러한 입소문은 이 학교가 교육목표를 `배워갈 수 있는 의사인격(lernfaehige Arztpersoenlichkeit)'에 두고 있었던 결과라고 하겠다. 이러한 교육목표가 강조하는 것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지식과 능력이 점차 불어나는 것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 것들을 책임있는 의사의 행위로 전환시킬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스스로의 한계도 경험할뿐더러 동시에 가능성을 넓혀가게 되며, 전문적인 지식의 영역을 넘어서 사회에서의 책임과 의무에 대한 능력까지를 함양하게 하는 것을 비전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이념은 2000년 4월부터 전반적으로 실시된 모범교육과정에서 구체화 되었는데, 이론과 실습의 병행, 과(科)의 개념을 탈피한 지식체계, 윤리와 인식론과 경제 등을 통합하는 개성화된 내용의 교양교육 등이 모든 커리큘럼에 혼재되어 있다. 이러한 교육에서는 자유와 책임이 학교교육의 기본개념이다. 대학은 학생들이 강의를 스스로 의문을 가진 문제에 답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이해하도록 습관시키는 곳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우리식의 교실강의는 없으며 기본적으로 문제바탕학습(PBL)으로 이루어진 탐구과정이 블록식 커리큘럼의 근간을 이루고, 개개인의 학습을 보충하기 위한 다양한 전문과적 세미나, 실습 및 면담(Sprechstunde)이 제공되어진다.

이 대학에서는 강의(Vorlesung ; 독일어로 강의는 청중들 앞에서 읽는 것을 의미)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일차원적이고 일방적인 강의라는 단어 대신에 서로 대화하고 문제와 답을 이끌어 가는 면담(영어로 interview)이란 말을 쓴다. 그만큼 기존방식의 지식전달을 거부한다. 학생교육에서 또한 강조되는 것이 통합커리큐럼(Integriertes Curriculum)이라는 것인데, 여기서는 환자나 동료 및 주어진 환경에 대해 적절한 프로페셔널한 관계를 이루기 위한 의사소통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와 관련하여 윤리학, 보건경제학, 정치학 및 과학적 방법론 등을 다루게 된다. 이 외에도 이 학교의 커리큘럼에는 매주 목요일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철학, 문화사, 문학 및 음악에 관한 강좌들에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학업 동기여부등 종합적 평가로 선발

대학의 이념과 설립목표가 특이한 만큼 이 대학의 학생선발과정에 있어서도 유별난 점들이 많다.

우선 입학사정의 첫 단계는 서류심사인데, 여기에선 물론 지금까지의 학교교육의 성적도 고려는 되지만, 무엇보다도 여러 종류의 자기소개서 및 이력서 등을 통해서 얼마나 학업에 동기부여가 잘 되어있는가를 우선적으로 판단한다.

일차서류심사에 통과된 학생들은 약 1주간의 합숙을 통해서 3차례 이상의 면접과 주어진 과제에 대한 발표나 시연을 하며, 동료간의 사회성, 생활태도 등이 함께 평가된 2차 선발과정을 거치게 된다. 또한 의과대학 입학 전에도 일반병원에서 환자들의 모든 수발을 드는 6개월간의 간호실습을 수료할 것을 권하고, 외국어인 영어에 충분한 지식이 있음을 증명하는 TOEFL 성적을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의 어느 의과대학생을 보아도 공부에 허덕이지 않는 학생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알아야 할 지식의 양은 날로 팽창하고, 거기에 맞추어 가다보니 진정한 인간중심의 자발적인 배움이 점차 망각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학교생활에서의 고된 배움의 과정도 그러려니와 점점 세분화 전문화되어 가는 전공의 과정, 그리고나서의 치열한 사회에서의 경쟁과 기계적 일상이 되어가는 임상생활. 이 모든 것이 처음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의 순순한 자세와는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요즘 의학교육의 새로운 바람이 불어, 보다 능동적이고 책임있는 의학도를 키워내고자 하는 열망이 높아지고 있는 즈음에 먼 유럽의 이 조그만 의과대학의 몸부림은 우리에게 또 다른 신선함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할 것 같다.

정철운 <포천중문의대 외과학교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