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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의학당 <15>
제중원의학당 <15>
  • 의사신문
  • 승인 2006.12.18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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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의학당, 문을 열다 1885년 12월부터 조선에서는 서양의학 교육기관 설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조선 정부가 부지 제공과 학생 선발을, 제중원의사 알렌이 교사 확보와 교육에 필요한 의료도구 구입을 맡았다. 1886년 2월 조선정부는 공립의원규칙을 공포했는데, 이때 의학당 운영에 관한 지침도 마련했다. 마침내 1886년 3월 29일 우리 역사상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기관이 문을 열었다. 이른바 제중원의학당이 그것이다. 학교 건물은 크게 세 동이었다. 큰 건물에는 강의실과 실험실이, 나머지 두 동에는 학생 숙소가 마련되었다. 16명의 학생이 선발되었고, 나중에 12명이 본과에 진출했다. 학생들은 영어·물리·화학 등 기초과목을 공부했고, 나아가 약 제조 법, 의료기구 다루는 법, 환자 간호법 등을 배웠다. 알렌이 화학을, 헤론이 의학 실무를, 언더우드가 영어와 물리를 가르쳤다. 수업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였다. 성적 우수자는 표창을 받았고, 중도 퇴학은 외아문 독판(오늘날의 외교통상부장관)과 교수회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했다.

학생들은 누구? 1886년 7월 29일 12명의 학생이 본과에 올라갔다. 그 중 주목할만한 인물은 진학순, 이의식, 이진호 등이다. 진학순은 1885년 의과에 합격했다. 7대조부터 부친까지 모두 의과에 합격했으며, 그 중 4명은 내의로 활동했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한의사 집안인 셈이다. 그런데 진학순은 제중원의학당에 입학해 서양의학을 배우려 했던 것이다. 이의식은 1886년 5월 12일 제중원 주사 발령을 받았다. 아마도 성적이 가장 좋았거나, 가장 연장자여서 우대를 받았던 것 같다. 요즘 대학생에 비유하면 `특별장학생'이나 `과대표'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이진호는 영어교육기관이었던 동문학 출신이다. 그리고 제중원의학당을 거쳐 연무공원의 생도가 되었다. 나중에 친일파가 되어 조선총독부의 학무국장(오늘날의 교육부장관에 해당)까지 지냈다.

제중원의학당의 실패 본과생 12명 중 나중에 양의로 성장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다. 이의식은 한성부와 탁지부 주사를 거쳐 군수가 되었다. 이겸래는 외무관료로 성장했다. 이진호와 윤호는 군 장교가 되었다. 최종악은 전보국 관리가 되었다. 결국 제중원의학당의 의료인 양성은 실패로 끝난 셈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우선 학생들이 언어장벽에 부담을 느꼈거나 서양의학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중도 포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 출세가 목표였던 나머지 성공 가능성이 높은 다른 분야로 진출한 것인지도 모른다. 반면에 미국인 교사들의 교육내용이 부실했거나, 그들이 기독교 선교사로서 은연 중 학생들에게 종교 교육을 하는 데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의학당을 불가피하게 떠났을 수도 있다. 또는 조선 정부의 의학당에 대한 방침이 변경되어 사실상의 폐교 상황이 연출되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제중원의학당의 실패를 통해 1880년대에 개인이든 국가든 서양의학을 수용한다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상태 <서울대병원 병원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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