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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김동희 기자, 태국 · 미얀마 접경
난민 의료봉사 동행 취재기 <중>
본지 김동희 기자, 태국 · 미얀마 접경
난민 의료봉사 동행 취재기 <중>
  • 김동희 기자
  • 승인 2006.12.11 17: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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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인술'로 나라잃은 설움 위안

대부분의 고산족들은 노인환자가 많아 고질적인 관절염을 호소하고 있었으며 장기간 육류섭취로 인해 고혈압, 심장질환자들이 다수였다. 조중생 단장은 심장전문의인 김수철·한미영 교수와 협의해 심장수술이 절실한 환자 2∼3명을 경희의료원에 초청, 진료해 줄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 보겠다고 환자들을 꼼꼼히 살폈다. 특히 한미영 교수는 초음파진료를 통해 심징질환이 심각해 보이는 환자들이 여럿 있었다며 태국 현지병원에라도 가서 수술을 받아야 하지만 신분이 불확실한 소수민족이라서 수술받을 수 없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현지병원서 차별 받던 노인 '감격'
한국 의료봉사팀의 진료소식에 오후 들어서도 환자들은 계속 늘어나기 시작했다. 카렌 전통의상을 입은 할머니, 맨발의 아이들, 아이를 들쳐맨 젊은 엄마 등등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어 부르는 사람의 목이 터진다. 현지서 만난 까레디써(남·60세) 할아버지는 약 40km 떨어진 곳에 병원이 있지만 병원에서 소수민족이라고 차별받은 후부터는 절대로 병원을 찾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의료진이 이렇게 멀리까지 찾아와 진료해줘 어떻게 감사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감격해 했다.

특히 이번 봉사에는 또 메짠공동체에서 운영하고 있는 미용실의 이미용봉사팀이 함께 참가, 한번도 머리손질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고산족들에게 수준 높은 미용서비스를 제공했다. 현지인들로 구성된 미용봉사팀은 소수민족 출신들로, 전도사들의 인도로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아 자신들이 습득한 기술로 자기 부족들에게 서비스하는 감격을 누렸다.

17년째 태국의 오지에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는 정도연 목사는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진료해야 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우문에 “차량이 들어갈 수 없고 전기를 쓸 수 없기 때문에 전혀 진료를 할 수 없는 환경”이라고 말했다. 또 “의료봉사팀의 숭고한 사랑의 인술이 지속되어 나라를 잃고 슬퍼하는 카렌족들에게 정신적인 위안이 되어 주길 간절히 바란다”고 당부했다.

수백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이렇게 첫날 진료가 끝났다. 칠흑같은 고산에서 바라보는 하늘의 은하수가 오랜만의 밤을 위안한다. 진료 후에는 카렌족마을 사람들을 위한 저녁 예배가 시작됐다. 음악회를 겸한 예배에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진료팀과 통역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어우러졌다. 이역 만리 타국땅에서 듣는 낭낭한 섹서폰 소리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기자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성령처럼 아름답게 들렸다.

다음날에도 일찍부터 찾아온 환자들로 인해 새벽을 설쳤다. 열대 지역의 아침은 이른 아침부터 시작됐다. 낮에는 아직 30도를 오르내리지만 새벽에는 동사자가 생길 정도로 추워져서 사람들이 추위를 견디다 못해 장작불을 지펴 오순도순 모여 있다.

진료 이틀째가 시작됐다. 다시 많은 사람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약을 타간다. 의료혜택을 받지 못해서인지 사람들의 약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내성이 없어서 너무 빨리 질환이 호전되거나 아니면 약에 취해 비몽사몽인 사람…. 정도연 목사는 이들이 약에 대해 무지해 무조건 많이 먹으면 좋은 줄 알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어린 학생들이 부족 전통의상을 입고 진료를 받으러 왔다. 처음보는 디지털카메라가 신기해서인지 연신 카메라를 보고 웃음짓다 찍은 사진을 확인할 땐 개미떼처럼 모여들어 폭소를 터트린다. 귀여워서 가지고 있던 사탕을 하나씩 주니 낯선 사람에 대한 거리감인지, 아니면 댓가없이 주는 음식에 대한 미안함인지, 잘 받으려 들지 않는다.

오전 진료를 끝내고 서둘러 철수준비를 했다. 다음 진료지인 카렌족 난민촌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므로 점심을 뜨는둥마는둥 하고 고산족 마을을 떠났다.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를 먼지내서 달리는 버스 꽁무니를 아이들이 뒤쫓는다. 언제 다시 올 지는 모르지만 한 사람의 인격체로 당당하게 살아가기만을 바랐다. 물질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저들에게는 조그만 물건이라도 소중해 보인다.

#긴시간 걸려 6만수용 난민촌으로
메똠 지역에서 미얀마 국경 카렌족 난민촌까지 200여km는 정말 멀고도 험한 길이였다. 중간 기착지인 메쌀리앙까지 대략 3시간을 달렸다. 그곳에서 태국 전통 쌀국수와 돼지 껍데기 무침, 손가락 바나나 등으로 식사를 하고 길이 험해서 버스로 이동하지 못한다는 설명을 듣고 10인승 미니버스 4대에 나눠 탑승했다. 영화에서나 보듯이 약품가방과 의료기기, 각자의 짐 가방을 버스 머리 위에 얹고 구절양장 같은 길을 또다시 끝없이 달렸다. 중간 기착지에서 국수 등을 든든하게 먹었지만 속이 영 불편했다. 다들 멀고 험한 길이지만 사명감에서인지 의무감에서인지(?) 잘도 버틴다. 중간중간에 태국 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를 보니 드디어 국경지역에 왔다는 실감이 난다. 3∼4개의 난민촌을 지나서 4시간여를 달려 메<&06687> 지역에 있는 미얀마를 탈출한 카렌족 난민촌에 도착했다.

저녁 8시인데도 주위는 칠흑같이 어둡다. 아마 전기 시설이 부족한 탓도 있으리라. 난민촌 학교 2층에 숙소를 정하고 짐을 풀었다. 삐걱거리는 마루바닥이라 불안도 했지만 이내 적응됐다. 정성스런 저녁대접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육류와 향이 강한 채소 위주의 반찬이 속을 더욱 괴롭혔다.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자란 것도 어디서나 현지 음식에 적응을 잘했는데 이번 의료봉사에서는 스타일을 구길 정도로 식사가 힘들었다.

식사 후 정도연 목사의 설명으로 미얀마 국경 상황에 대해 안내 받았다. 이 지역은 미얀마(구 버마) 정부가 들어서면서 박해를 피해 국경을 넘은 미얀마 내의 카렌족 난민 6만여명이 수용된 대규모의 난민촌이라고 했다. 이들은 다수 부족인 미얀마족의 박해로 자기의 나라를 떠나 태국 정부의 눈치를 보면서 사방이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이 지역에서 UN의 지원을 받으며 꿈도 희망도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이 곳에서는 오로지 UN이 지급하는 식량과 물품만으로, 또 이곳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 태국 정부는 난민촌에 자국 땅을 임대해주고 있다는 조건으로 UN에 지원을 받고 있어 난민촌이 얼마든지 생겨도 자국의 이익 때문에 환영이란다. 또 이곳 난민촌에서 나오는 목재나 보석, 마약 등으로 부를 축적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카렌족 독립군 본부가 있는 이곳의 젊은 남자들은 대부분이 전쟁 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실제 전투 중 부상당해 장애를 가진 젊은이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현재 이곳의 대표는 미얀마 정부와의 협상 테이블에 앉아 카렌족 자치구로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친영국 정책을 펴고 있는 카렌족을 위해 어느 영국 시인은 이들의 삶을 보며 “이곳 사린강 강물은 아직도 슬픔에 가득차 있다”고 노래했다.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젊은이들의 결의가 숭고해 보이기는 하지만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이들 젊은이들의 눈동자가 슬퍼 보인다. 과연 정신과 육체적인 자유가 없는 카렌족의 처지를 안타까워해야만 하는지…. 저들을 깊이 이해 못하는 어설픈 동정심이 나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나만의 잣대로 저들을 보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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