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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의 여성 의사들 <14>
제중원의 여성 의사들 <14>
  • 의사신문
  • 승인 2006.12.1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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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불문율이 존재하던 시절인 만큼 남자 의원이 여성 환자를 진료하는 것은 매우 난감한 문제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관기(官妓) 중에서 의녀(醫女)를 뽑았다. 의녀들은 궁중과 양반가문의 여성을 진맥하고 약을 상의하거나 환자들을 간호했다. 때로는 각종 범죄사건의 여성 피의자를 몸수색하는 일이나 각종 연회에 불려가 취흥을 돋우는 기생 노릇까지 맡았다.

의녀들은 여의사이자 간호사이자 여형사이자 기생까지 1인 4역을 해낸 것이다.

위안스카이의 횡포
세월이 흘러 근대화가 한창 모색되던 1885년, 조선 정부는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으로 제중원을 개원했다.

이때 진료 책임자였던 의료선교사 알렌의 최대 고민 역시 여성환자 진료 문제였다. 상류사회의 부인들을 치료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마당에서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통행을 금지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또 자기 몸을 남자 의사, 그것도 서양인 의사에게 보이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진료를 거부하는 경우도 많았다.

민비(명성황후)가 병환을 앓고 있을 때에는 천으로 감싼 왕비의 팔을 칸막이를 통해 1인치 정도만 볼 수 있었다.

알렌은 이런 불편을 해결하고자 기녀(妓女)들을 뽑아 의술을 학습시켜 의사나 간호사로 키우려 했다.

그러나 제중원에 배치된 여성 의사(간호사) 후보생들은 실제로는 연회에 참석해 기생 노릇을 해야 했고, 결국 당시 조선에서 `총독'처럼 기세등등하던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팔려가고 말았다.

엘러즈, 조선에 오다
결국 이 고민은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여성 의사 엘러즈로 인해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엘러즈(Annie Ellers, 1860∼1938)는 보스턴의대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886년 7월 조선에 건너왔다.

그녀는 제중원에서 여성 환자들을 진료했으며, 알렌의 추천으로 민비를 진료한 후 시의(侍醫)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육영공원 교사였던 벙커(Dalziel A. Bunker)와 결혼하면서 제중원에서 물러났다. 엘러즈는 정신여학교(지금의 정신여고)의 창설자이기도 하다.

호튼, 민비를 진료하다
1888년 3월 엘러즈의 후임으로 호튼(Lillias S. Horton, 1851∼1921)이 조선에 도착했다. 그녀는 시카고여자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낯선 조선에 건너왔다.

그녀는 엘러즈와 마찬가지로 제중원에서 여성 환자들을 진료하는 한편 민비의 시의가 되었다. 어느 날 호튼에게 민비를 알현하라는 소식이 왔다. 그녀는 엘러즈와 함께 입궐해 고종, 민비와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호튼이 보기에 고종은 품성이 좋은 친절한 신사였다. 민비는 조금 창백하고 매우 가냘펐지만, 날카로운 듯 하면서도 지적이고 고상했다.

당시 민비의 병이란 란셋(lancet)으로 절개하면 될 작은 부스럼 정도였다. 그러나 외과용 도구를 민비의 몸에 대겠다는 말을 하기가 무섭게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공포심과 분노에 휩싸였다. 특히 고종의 태도는 단호했다. 결국 호튼은 하는 수 없이 느긋한 치료에 의지해야 했다.







김상태 <서울대병원 병원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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