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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진료시간 안됐나요?"
"아직 진료시간 안됐나요?"
  • 의사신문
  • 승인 2006.12.1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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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남들이 이른바 `의료대란'이라 일컫는 2000년도 우리의 `의권투쟁' 이후, 이 역사적 사건이 의미하는 여러 긍정적 측면은 차치하고, 경제적 측면에서만 바라본 진료실 분위기는 타 직종에 비해 급속하게 쇠퇴해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나, 보험청구가 95% 이상이 넘는 이른바 보험청구과(?)는, 명색이 의사라는 직업이 이래도 되나 할 정도로 사회적 체면과 품위유지는 고사하고 그야말로 기본적인 생계와 자녀교육을 걱정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여도 그리 큰 엄살은 아닐 것이다.

나름대로 긍지와 보람을 가지고 임하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때론 실망과 회의감에 빠지는 경우가 어디 우리 의사들뿐이겠는가 마는, 그래도 자존심 하나로 버텨왔다. 그러나 환자나 보호자들의 악의 없이 무심코 튀어나온 한 두 마디의 말과 행동에도 순간적인 절망감과 자괴감에 빠져버리는 것은 지나친 피해의식의 소산일까.

하루 종일 우울증에 빠뜨리는 몇 가지 일상들. 마음을 다잡고 평소보다 한 30분 일찍 출근한 날, 이런 날 따라 적막함이 지속되다가 겨우 10시가 다 되어서야 첫 환자가 나타난다. “어머, 아직 진료시간이 안되었나요?” “??…” 거기에 엎친데 덮친다고 진료비계산을 위해 내신 돈이 10만원권 수표라니. 공연히 약이 오르는 걸 겨우 달래며, 지갑에서 만원짜리 10개를 꺼내 수표와 바꾸어 준다. 모임에서의 체면치레나 유지를 위한 비상금이 아닌, 바로 이런 상황에 신속히 대처할 요량으로 지갑에 최소한 10만원은 넣고 다닌다. 그래도 외상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외상이야기가 나왔으니 요즘 부모님들은 모두 직장생활을 하시는 탓에 아이들만 동네의원으로 보내면서 꼬깃꼬깃한 메모지에 증상을 상세히 적어 보내며, 마지막에 한마디 부탁의 말씀을 덧붙이는 경우가 간혹 있다. “아이가 돈을 잃어버릴 것 같아 그냥 보내니 외상으로 해 주세요.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한 술 더 떠서, 약값 1500원까지 병원에서 미리 지불해 주신다면 한꺼번에 갚아 드리겠다는 정중한 부탁까지 덧붙이는 경우도 더러 있다. 안해 줄 수도 없고…. 일부러 그럴리는 없겠지만,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에 너무 바쁘다보면 이런 정중한 부탁도 잊어버리기 십상인가보다. 그렇다고 쩨쩨하게 3000원 외상 진료비를 갚으라고 전화 할 수도 없고. 결국 몇 개월 뒤 다시 내원했을 때는 지난번 3000원(약값 포함인 경우는 4500원) 미수금이 있으니 달라고 하기도 민망하고, 용케 기억력 좋은 부모님 만나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음 뇌리에서 사라지는 역사의 한 사건에 불과할 뿐이다.

이상하게도 동네의원에만 오시면 정의감에 불타 용감해 지시는 분들이 간혹 있다. 한 예로, 다른 업소에서는 1만원 미만은 현금으로 잘도 지불하시는 분들도 진료비 3000원은 당연하다는 듯이 카드로 결제하신다. “잔돈이 있긴한데, 요즘 의사들을 비롯한 전문직들이 세금을 제대로 신고 안한다길래”라는 말과 함께.

또한 식당을 비롯한 다른 업소에서는 문고리나 의자 모퉁이에 찧어도 항의한번 못하시는 분들도, 진료실 내부에서 발생한 조그만 안전사고에는 고래고래 목청을 높이는 분들이 간혹 있다. 결국 진료비라도 면제받으셔야 그 등등한 기세가 멈추는 경우도 있다.

어쩌다 10여명의 환자가 한꺼번에 몰려 갑자기 대기실이 난장판이 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소아과의 경우 10여명의 환자가 오면, 엄마·아빠·오빠·동생·친구 등 딸린 식구들로 인해 20∼30여명이 북적이는 경우가 태반이다. 북새통속에 한 30여분 대기하다 드디어 진료실로 들어서신 엄마의 짜증 섞인 한마디. “아유!, 저 건너 OO의원서 지난번 1시간이상 기다려서 이리로 왔는데 여기서도 1시간 가까이 기다리네!” “…”

이제는 이러한 일상에도 익숙해진지가 5∼6년이 지나고 또한 스스로도 내공이 쌓여 환자들의 웬만한 이야기와 불만토로에도 가능한 “네, 네”하며 EQ(감성지능지수)와 더불어 SQ(사회지능지수)를 높이려 스스로 애쓰며 하루를 마감한다. 하지만, 가끔씩 아주 가끔씩은 가슴 한켠에서 휑한 썰렁함이 이는 것은 아직도 수양이 부족한 나만의 못된 심성과 욱하는 성질 때문일 것이다.






박상호 <서울시의사회 의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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