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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개로 옮긴 제중원 <13>
구리개로 옮긴 제중원 <13>
  • 의사신문
  • 승인 2006.12.04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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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상회관 옆의 제중원
 조선 정부의 통리아문 일기에도, 알렌의 일기에도, 청국 공사관의 기록에도 제중원 이전 날짜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둘러싸고 김윤식, 알렌, 원세개, 또는 고종 사이에 모종의 논의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는 이들 중 원세개의 발언권이 가장 강했다. 1886년 여름경, 제중원은 아무런 이전 행사도 치르지 않은 채, 청상회관과 청국군 병영 사이, 옛 양향청(糧餉廳) - 군량의 보관 및 군료(軍料)의 지급을 맡은 관서 - 옆 자리로 옮겨 갔다.

중국 서양의학과 원세개
 조선 정부가 자의로 제중원을 청국인 거류지 한복판으로 옮겼다고 보기는 어렵다. 설령 조선 정부의 행정이 아무런 일관성도 없는 엉터리였다고 할지라도 홍영식의 집을 병원으로 개조한 지 1년여, 그 윗집을 새로 구입하여 의학교 시설로 제공한 지 반년도 안되어 병원을 옮길 정도는 아니었다. 원세개는 훗날 천진에 해군대학당 부속 의학교를 만든 인물로서, 중국 정부 차원에서 서양의학을 도입하는 데에도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 때 의학교 교사로 초빙해 간 인물도 다름 아닌 대한제국 관립의학교 교사였던 후루시로 바이스케(古城梅溪)였다. 중국에 서양의학이 소개되고 서양식 병원이 생긴 것은 조선이나 일본보다 훨씬 이른 시기의 일이었지만, 정부 차원에서 서양식 의학 교육기관을 세운 것은 해군대학당이 최초였다. 여기에는 원세개가 조선에서 제중원의 알렌을 만나고 그를 통해 서양 의학에 접한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외상이 잦았던 청국 병사들
 알렌이 원세개를 치료한 일은 없지만, 청국 병사들은 여럿 치료했고 원세개의 첩(妾)도 치료한 적이 있었다. 특히 당시 청국 병사들은 종주국 군인으로 자처하면서 서울에서 온갖 행패를 부리다가 조선 군병이나 상인들과 자주 싸움을 벌였고, 그 때마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 그들이 `외과술에 특히 뛰어난' 제중원 의사에게 상처를 보이고 치료받기 위해서는, 청국 병사들을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조선 상인들의 땅, 종로를 횡단하여 조선인 동네 깊숙이 재동까지 들어가야 했다. 그 길목에서 또 다른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원세개도 조선 정부도, 분쟁을 줄이기 위해서는 제중원을 차라리 청상회관 옆으로 옮기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청상회관 주변은 1882년에 전의감에 합설되면서 실질적으로 소멸한 혜민서(惠民署)가 있던 곳에서 가까웠고, 조선 후기 이래 약포(藥鋪)가 줄지어 있던 곳이기도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청국 군병과 경찰들이 수시로 돌아다니는 곳에 조선인 환자들이 자주 왕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원세개가 빼앗아 간 여자의학생
 1885년 8월 조선 정부는 다섯 명의 약방 기생을 뽑아 제중원에서 알렌을 도와 여자 환자를 보살피도록 했는데, 그 중 두 명은 얼마 안되어 다른 곳으로 옮겨 갔고 남아 있던 세 명도 1885년 12월에 청국 상무공서로 옮겨갔다. 사정을 잘 모르던 알렌은 이들이 “원세개에게 팔려갔다”고 썼지만, 관기(官妓)는 사고 파는 대상이 아니었다. 원세개가 제중원에서 일하던 약방 기생들을 빼앗아 간 것이 그들이 배운 `의술' 때문인지, 그들의 `가무(歌舞) 솜씨' 때문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다른 모든 분야에서 그랬던 것 처럼 조선 정부 사업에 대한 원세개의 간섭과 횡포도 제중원의 정상적인 발전을 저해한 중요 요인이었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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