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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지겹게' 반복해야 하는 이유 <12>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지겹게' 반복해야 하는 이유 <12>
  • 의사신문
  • 승인 2006.12.04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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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 교수 · 시스템 기본틀 작동도 '삐걱'

이 칼럼 때문에 의학교육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진 분들도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반면에 `의학교육'이라는 단어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분들도 있을까 염려된다. 사실 그동안 여기서 다룬 대부분의 화두가 잠시만 생각해보면 `구태여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왜? 왜 우리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들을 자꾸만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문외한→전문직' 변신 과정 미원활


그것은 아마도 아직 많은 것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는 의학교육계만의 특이한 현상은 아니다. 아직 많은 것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 사회에서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와야할 `당연한 제자리'에 관한 이야기들이 어른들의 신문과 방송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된다. 우리의 정치가 그렇고 경제가 그렇고 또 의학교육 등등이 그렇다.

 다시 지겨운(?) 의학교육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의과대학 혹은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이루어지는 기본의학교육은 의과대학 입학생을 의사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졸업생으로 만드는 일련의 복잡한 프로세스로서, 이 프로세스를 통해 학생들은 지식과 기술을 익히고 문외한(layman)에서 전문직(professional)으로 변신한다. 우리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만 그러나 이 프로세스가 과연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로세스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프로세스 자체는 블랙박스(Black Box)로 놓아두고 입학생과 졸업생의 능력을 비교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택하면 결론은 뻔하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4년을 거치면서 어떤 한 부분이라도 변하지 않는 학생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름지기 과학을 한 사람들 아닌가? 이런 경우 의학 분야에서 많이 쓰이는 무선대조군 실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 정도는 동원해야 과학적 의학을 전공한 사람들로서 자존심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의과대학 입학생들을 여러 의과대학에(우리보다 앞선 나라와 뒤진 나라를 포함하면 좋을 것이다) 무선할당하고 4년 후 그 실력을 비교해야 특정 `대학 혹은 국가의' 의학교육 프로세스의 효과성이 입증될 수 있다는 말이다. 독자 여러분 모두가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을 해보시기 바란다. 결론은? 자명한가?

 사고실험을 해보시라는 것은 이런 실험은 피험자의 동의를 얻기 어렵고 윤리위원회를 통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교육은 피험자(Subject)와 처치(Treatment), 그리고 효과가 존재하는 문자 그대로, 한 치의 틀림이 없는 `실험'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효과성이 입증되어야만 `교육' 스스로의 존재이유를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에', 잊는다.

#구태의연 모습 반복땐 미래 어두워


비교실험이 어렵다면 다른 방법은 없을까? 또 다른 유력한 방법은 앞에서 블랙박스로 놓아두었던 프로세스 자체를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의학교육의 대가로 불리는 미국 남가주 대학의 에브럼슨(Stephen Abrahamson) 교수는 기본의학교육의 프로세스를 학생과 교수, 그리고 의과대학이라는 3자의 틀로 바라보고 있다. 이 3자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살펴보면 기본의학교육의 프로세스를 점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이 `제대로' 인가는 학생에 대해서 `학습의 과학'이, 교수에 대해서 `교수의 과학(Science of Teaching)'이, 의과대학에 대해서 `시스템의 과학'이 잘 작동하고 있는지에 의해 판단할 수 있다.

 에브럼슨에 의하면 `학습의 과학'은 (1) 학생은 저마다 적합한 학습유형을 가지고 있는 개성체로 대해야 하며 (2) 학습에는 동기가 중요하고 (3) 학습이란 학습자 개개인의 삶에 의미 있는 경험이어야 하며 (4) 학습에는 피드백이 매우 중요하다는 4가지 원칙으로 요약될 수 있다.

 또 `교수의 과학'은 교사는 (1) 가르치는 주제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갖추어야 하고 (2) 가르침의 대상인 학생에 대해 완벽한 지식을 갖추어야 하며 (3) 학습목표와 교육방법을 일치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는 3가지 원칙으로 요약된다.

 마지막으로 `시스템의 과학'은(이 부분은 에브럼슨의 이야기에 필자의 주장을 좀 가미하자면) (1) 대학은 정체성(미션)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고 (2) 의과대학이 수행하는 교육, 연구, 진료, 봉사의 기능들은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영향을 미치며(동일한 자원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며) (3) 학습의 과학과 교수의 과학은 의과대학의 운영제도 및 시스템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3가지 원칙으로 요약될 수 있다.

 지면관계상 위의 내용들을 제각기 상세하게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위 3개의 과학이 각 의과대학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는 직관만으로도 그리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학생, 교수, 대학 시스템에 대해 정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으면 자신이 겪은 의과대학 시절을 회상하면 될 것이다. 본질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으니까….

 극소수의 대학을 제외하고 전교생에게 천편일률적인 강의를 실시하고 있는 현 상황이 `학습의 과학'의 첫 번째 원칙을 충족하는가?  교수가 학생을 일대일로 대면하는 일이 연중행사 지경인 현 상황이 개개인에 대한 피드백을 중시하는 네 번째 원칙을 충족하는가?

 교수의 과학을 보자면, 주제에 대한 완벽한 지식이야 충족시키고 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되지만 우리 교수들이 학생 혹은 학습자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또 오늘날 의과대학은 교육을 자신의 최우선적인 사명으로 설정하고 있는가? 의과대학의 업무 중 교육에 할애되는 자원의 비율은 얼마나 되는가? 의과대학의 운영제도와 시스템은 학습의 과학과 교수의 과학을 떠받쳐 지원해주고 있는가?

 어느 정도 경험과 상식이 있다면, 지금 우리나라 대부분의 의과대학에서 `학습, 교수, 시스템' 3개의 과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데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나라 의과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기본의학교육의 프로세스는 아직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수의 법칙·상황의 힘등 변화 열망


 아주 길게 에둘러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아주 자명하게 믿고 있는 `문외한(layman)에서 전문직(professional)으로 변신시키는' 기본의학교육 시스템조차 아직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것이다. 서두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들을 지겨울 정도로 자꾸만 반복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뭔가 변화를 바라기 때문이다.

 한때 대형서점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던 `티핑 포인트(The Tipping Point: How Little Things can Make A Big Difference)'라는 책에서 저자는 해리포터 시리즈, 포켓몬스터 등의 유행뿐 아니라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는 사회현상이나 역사적 사건에는 3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하였다. 열성적이고 영향력 있는 소수의 존재(소수의 법칙),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고착되는 메시지(고착성 요소), 그리고 잘 맞아 떨어진 주변의 상황(상황의 힘)이 그것이다. 우리가 당연한 이야기들을 자꾸만 반복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을 바라기 때문이라고 해도 좋다. 물론 `고착'되는가는 별도의 문제지만….







신좌섭 <서울의대 의학교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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