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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사 · 사람의사
예수의사 · 사람의사
  • 의사신문
  • 승인 2006.10.30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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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 사회주의에 빠지지 않는 자는 가슴(열정)이 없고 나이 들어서도 사회주의자인 사람은 머리(이성)가 없다'라고 했던가. 원하던 전공은 따로 있었는데 반강제로 의과대학에 왔던 필자는 젊은 의대생 시절 숨막힐 것 같은 의과대학의 분위기를 저주하면서 그래도 적응하려고 발버둥치며 살았지만 어느 틈에 그 일원이 되고 말았다.

그 시절 20대 초반의 젊었던 필자는 나이 40이 되어서도 20대의 느낌, 생각을 잃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을 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 때 20대 젊은이의 눈에 40이면 대단한 나이였고 또 그에 걸 맞는 힘과 영향력이 있어 의과대학의 분위기를 쇄신할 줄 알았던 순진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50을 바라보는 지금 필자는 간혹 그 때의 다짐대로 행동하다가는 선배로부터 `아직 철이 나지 않은 후배'로 핀잔을 듣고 후배나 학생들에게는 그저 그런 기성세대의 일원이 되고 말았다.

이 얘기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초심을 잃지 말자'인데, 이런 말이 자꾸 나오는 이유를 좀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사람들이 뒷간에 갈 때와 올 때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뒷간 심리'는 의료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아플 때는 의사가 하나님으로 보였다가 낫고 나면 사람으로 보이고, 치료비 낼 때가 되면 의사는 악마로 보인다'는 농담이 있지만 진료를 하다 보면 간혹은 환자의 병세가 호전되고 난 후 속이 보이는 환자·보호자의 태도 변화에 실소를 금치 못할 때가 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놓고 “고맙다”는 인사는 커녕 “보따리 달라”는 말 안 들으면 다행인 세상이 된 것이다.

술자리의 안주 거리로나 어울릴 이 뒷간 심리를 시침 뚝 떼고 정말 그림으로 그려 낸 화가가 있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니 화가가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능청스럽다고 해야 할지…. 첫째 그림을 보자. 화면 중앙에 예수님의 모습을 한 의사가 그려져 있다. 준수한 용모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의사가 큼지막하게 그려진데 반해 주위의 환자들은 작게 그려져 있어 마치 중요도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는 어린 아이의 그림이나 원시미술을 보는 것 같다. 어린 아이에게 “엄마가 더 좋으니, 아빠가 더 좋으니?”하는 잔인한 질문을 던져 아이를 말더듬이로 만드는 것 보다 아이에게 엄마, 아빠를 그려보라고 하면 자신에게 더 큰 의미를 갖는 존재를 크게 그리기 마련인 것을.

아플땐 한없이 우러러 보이는 예수의사
병호전따라 초인적 존재 아닌 사람의사
환자의 눈에 비친 간사한 인간심리 풍자



예수 의사는 허리춤에는 각종 진단도구를 차고 있고 심각한 표정으로 플라스크에 든 검체를 보고 있다. 이 의사는 지금 소변검사를 하는 중인 것 같다. 옛날에는 소변을 가열해서 침전이 생기는 것으로 단백뇨를 진단하였고 가장 믿을만한 검사였으니 아픈 환자는 누구나 이 검사를 했을 것이다. 배경에는 아픔과 당황함에 어쩔 줄 모르는 다양한 환자와 가족들이 그려져 있다. 다리가 아픈 사람, 배가 아픈 사람, 아픈 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엄마 등등. 요즘의 경황없는 응급실과 흡사한 모습인데 지금 그림 속 환자나 가족들의 눈에 비친 침착하고 의연한 의사는 그림의 예수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예수님 의사의 머리 뒤로는 찬란한 금빛 후광까지 빛나고 있어 아픈 이들에게 의사가 얼마나 우러러 보이는 귀한 존재인지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하고 있다.

두 번 째 그림에서 배경의 환자나 가족들은 병이 호전되어 한결 여유를 찾은 모습이다. 퇴원을 앞둔 입원실의 모습이라고 할까. 이번에도 의사는 그림 중앙에 당당한 모습으로 큼지막하게 그려졌지만 더 이상 절대자의 모습이 아니라 환자나 보호자들과 똑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게다가 자세히 보면 선하게만 보이던 예수 의사에 비해 조금은 심술궂은 표정이다. 이제 치료비를 낼 때가 된 것이다.

이 그림에서 `사람'으로 묘사된 의사는 더 이상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다. 바로 뒤에는 다른 의사들과 병의 경과에 대해서 토론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또 의사의 바로 앞에는 의학 서적이 펼쳐져 있어 `사람' 의사가 초인적인 존재가 아니라 책과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있음을 시사한다. 순식간에 절대자에서 보통 사람으로 격하되었다. 바로 뒷간에 갈 때와 올 때의 마음이 달라진 환자의 눈에 비친 의사의 모습을 시침 뚝 떼고 그림으로서 간사한 인간의 심리를 풍자하고 있다. 그림의 작자는 확실치 않지만 암스테르담을 무대로 활동했던 네덜란드의 화가 van den Valckert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작자가 확실치 않으니 그림이 그려진 시기도 확실치 않지만 대략 17세기 초엽이라고 여겨진다. 그림의 완성도나 예술적 가치가 아주 높은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의사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이다.

그림에 조금 관심이 있는 서양 의사들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즐겨 올리는 그림이 바로 예수 의사이다. 두 그림 모두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데 확실한 소장처는 모르겠다. 의사가 의학 정보를 독점하던 시대는 지났다. 게다가 아직도 현대 의학이 가야 할 길은 먼 것이다. 의학의 진리가 망망한 대양이라면 의사란 존재는 기껏 허리춤 정도 깊이의 바다 속을 들여다 본 존재라고나 할까. 백사장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환자나 가족보다야 많이 아는 전문가라지만 절대적인 존재는 절대로 아닌 것이다. 의사 노릇을 하면 할수록 환자가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현대 의학의 한계를 이해하고 의사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를 판단해 가면서 치료에 임하는 것이 의사 - 환자 사이의 진정한 신뢰구축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열심히 병의 예후와 각종 치료법의 장·단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자율성의 원칙'에 입각해서 치료방법의 선택을 할 기회를 제공할 때는 “우리가 뭐 압니까? 선생님을 믿고 왔으니 알아서 해 주세요”하는 환자나 보호자들이 있다. 이런 사람일수록 치료 초기에는 의사를 우러러 보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보따리 내놓으라고 표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보다는 열심히 공부하고 의논의 상대가 되는 환자가 당장은 귀찮아도 후에는 백 번 낫다. 평범한 의사에게는 하느님 대접도 부처님 대접도 다 싫고 그저 이 사회가 의사를 전문가로서만 제대로 대접을 해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 있다.


한성구 <서울의대 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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