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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사신문
  • 승인 2006.10.30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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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먼 옛날 천하를 얻은 진시황은 불사약을 찾았다지만 부질없는 발버둥이다. 병석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독설가에게 “죽음이 어떤가” 하고 짓궂게 묻자 “아직 안 죽어봐서 모르겠다” 고 쏘아 부쳤다는 일화에서는 죽는 자의 외로움과 분노가 느껴진다.

죽음은 누구도 원치 않지만 그렇다고 피해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종합병원의 내과 의사는 죽어 가는 환자를 끝까지 곁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겉보기에 냉정한 의사도 이런 일을 반복하면 자신도 모르게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마치 가랑비에 슬그머니 옷이 젖는 이치와도 같다. 죽어 가는 환자를 대할 때 “살만큼 살았다”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환자와 한창 나이에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환자를 대하는 것은 사뭇 다르다.

퀴블러-로스라는 정신과 의사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를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의 5단계로 설정하였는데 상당히 그럴 듯해 보인다. 젊어서 죽는다는 것은 자아실현의 기회를 송두리째 날려 버리는 것으로 그 누구에게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인만큼 부정이나 분노가 클 수밖에 없겠다. 옛날에는 젊어서 죽는 가장 큰 원인은 결핵이었다. 뭉크의 `봄(1889년 국립미술관, 오슬로)'은 머지않아 죽음을 앞두고 있는 젊은 여인의 소외와 좌절을 침묵 속에 그리고 있다. 창 밖은 화창한 봄날이다. 창가의 밝은 빛은 화사하기 이를 데 없고 얇은 커텐을 날리는 봄바람이 피부에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방안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다. 침묵이 흐른다. 결핵을 앓고 있어 자신이 얼마 안 있어 죽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젊은 여인은 만물이 소생하는 화창한 봄날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자신의 불행과는 상관없는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좌절과 소외가 느껴진다. 환자의 곁에는 야윈 뺨의 중년의 부인이 앉아 있는데 여인을 바라보고 있는 비스듬한 뒷모습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두 사람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어 환자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화창한 봄빛을 처리한 화가의 솜씨가 놀랍다.

우선 훑어보기에는 애잔한 느낌일 뿐 후기 뭉크의 작품에서 느끼는 기괴함이나 분열적인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림의 주인공은 뭉크의 누나인 소피라고 알려져 있다. 뭉크의 어머니도 결핵으로 뭉크가 5살 때 사망하였다. 이 시기 뭉크는 의사였던 아버지가 절대자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고 정신분석은 말한다. 곁에 있는 부인은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집안 살림과 조카들의 뒤치닥 거리를 헌신적으로 해 주었던 이모 카렌인데 매우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화창한 봄날 창가 밝은 빛은 화사한데
어둡게 가라앉은 방안분위기는 대조적
결핵앓는 젊은 여인 좌절·소외 느껴져



뭉크와 정서적 유대관계가 깊었던 소피 누나는 16세 때 사망하였으니 그림 속의 여인의 나이는 16세보다 많지 않을 것이나 훨씬 성숙해 보인다. 이 그림은 누이가 사망한지 8년이 지난 후에 그 때의 기억을 되살려 그린 것이니 긴 병 끝에 심적으로 분노와 좌절, 체념을 겪은 누이가 어린 뭉크의 눈에 성숙해 보였으리라. 하지만 다시 환자의 눈을 보자. 깊게 그늘진 눈, 그러나 놀랍게도 눈빛은 살아 있다. 젊어서 죽어야 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가 속으로 끓고 있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야무지게 다문 입술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 여인은 아직 자신의 죽음을 마음속으로부터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라트라비아타라는 오페라의 여주인공인 비올레타가 -역시 결핵을 앓고 있다- 젊어서 죽어야 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아리아를 듣고 있는 느낌이다. 이 절규에 가까운 아리아는 긴박한 현의 피치카토와 어우러져 가슴을 후벼판다. “이제 모든 고통이 끝나고 기쁨이 찾아 왔는데 바로 이 순간,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하다니…” 깊은 침묵 속에는 이렇게 끓는 분노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페론 감마 수용체의 부족으로 백약이 무효이었던 결핵을 앓은 끝에 죽어야 했던 젊은 여인이 생각난다.

난치성 결핵 환자의 상당수는 의사의 지시대로 약을 복용하지 않고 마음대로 투약을 중단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책임이 상당 부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환자는 긴 투병기간 단 한 번도 의사의 지시를 어긴 적이 없었다. 주치의는 놀라운 투병의지와 의사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 감탄만 거듭할 뿐이었다. 그러나 인터페론 감마 수용체의 부족이라는 선천적인 결함 때문에 치료 효과를 보지 못하고 수년간 좌절과 고생을 거듭한 끝에 20대 후반에 그만 최후를 맞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 오자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주치의의 손을 잡은 환자는 메마른 입술로 안간힘을 쓰며 말한다. “선생님,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잘못한 것이 없어요” 이 좌절과 분노를 헤아릴 수 있을까. 우리는 뭉크의 이모와 누이를 `병든 아이(1886년, 국립미술관, 오슬로)'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이 그림에서는 좌절과 분노가 체념이라는 포장을 벗어 던진 채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머리숱이 적고 창백한 아픈 소녀의 허공을 쏘아보는 시선. 고개를 숙인 부인의 깊은 좌절에서는 어머니를 대신한 이모의 절절한 사랑이 묻어 난다.

그림의 오른 쪽 아래 부분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약그릇이 놓여 있다. 두 사람 모두 또 검은 옷이어서 병든 소녀의 운명을 짐작케 한다. 같은 대상을 그린 것인데 분노를 속으로 삭히고 체념을 표현할 때는 훨씬 성숙한 모습으로, 분노와 좌절이 표면에 나타날 때는 소녀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 흥미롭다. 그림을 그린 연도는 `병든 아이'가 족이 3년이 빠르지만 누이가 죽었을 때 뭉크는 고작 14살이었던 만큼 두 그림 다 훗날 기억을 되살려서 그린 것이다.

여기에서는 후기 뭉크 작품에서 나타나는 기괴함과 불안의 싹이 보인다. 지금 결핵은 불치의 병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그림을 안전지대에 앉아 불구경하는 심리로 감상할 수가 있고 결핵 환자들도 자신의 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많다. 1970년대 리팜핀의 개발이후 95%이상의 치유율을 보이는 4제 병용요법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런데 요즈음도 1∼2개월 치료 후 증상이 없어지면 다 나았는데 의사는 괜히 자꾸 약을 먹이려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 약을 끊어 결국 약에 대한 내성을 유발하고 난치성 결핵으로 만들고 있는 환자들을 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암환자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생명연장을 위한 치료를 거부한다면 그 결정은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결핵환자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 결핵은 전염병이므로 약을 먹지 않아 다시 균을 퍼뜨리게 되는 그 순간 그는 공중보건의 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결핵환자가 약을 먹는 것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일 뿐 아니라 남을 배려해야 하는 사회적인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그건 그렇고, 100여 년 전의 사람들에게 결핵이 속수무책인 공포의 대상이었듯이 지금은 암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후세의 사람들이 “21세기 초반까지도 암에 걸리면 절망적이었지” 하고 되 뇌이며 감상할 수 있는, 암 환자의 절절한 내면세계를 요즘의 화가들은 주목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한성구 <서울의대 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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