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3 18:07 (화)
제임스 벌저와 영국이 가르쳐 준 것
제임스 벌저와 영국이 가르쳐 준 것
  • 전성훈 변호사
  • 승인 2022.01.25 10: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48)
전성훈 변호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성훈 변호사법무법인(유한) 한별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보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한 이 속담은 어느 모로 보나 옳다. 눈은 인체 부피의 5천 분의 1이지만, 사람이 얻는 정보의 85%가 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행동을 분별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의 시야는 기껏 해야 수백 미터밖에 못 미친다. 그래서 더 먼 곳을 보고자 하는 사람의 욕망은 사진, 영화, TV 등 영상 매체들을 개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더 먼 곳을 볼 수 있게 되자, 사람은 ‘실시간으로’ 보고자 했고, 그 결과 CCTV라는 것이 발명되었다.

2020년 한 매체는 세계에서 공공 CCTV가 가장 많이 설치된 도시 순위를 발표했다. 예상되는 바와 같이, 1, 2위는 중국의 베이징, 상하이였다. 그리고 20위까지의 도시 중 중국 도시가 16개였고, 인도 도시가 3개였다. 그러면 나머지 1개 도시는 어디인가?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영국의 런던이었다. 그것도 무려 3위이다.

중국과 인도는 그렇다 치고,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나라인 영국을 압도적인 CCTV 천국으로 만든 것은, 1993년 영국 리버풀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었다.

드니스 벌저는 2살 아들 제임스 패트릭 벌저를 데리고 장을 보러 나왔다. 그녀는 혼잡한 마트에서 잠시 아이의 손을 놓쳤는데, 불과 몇십 초 사이에 아이가 없어져 버렸다. 도저히 아이를 찾을 수 없어 그녀는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마트 주변 CCTV 영상에서 10살 정도 된 소년이 제임스의 손을 잡고 데려가는 모습을 확인했다. 수사 끝에 경찰은 소년 2명이 계획적으로 제임스를 데려간 것으로 판단했다.

이 유괴 사건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 영국 전역에 알려졌고, 사람들은 걱정하면서도 소년들의 소행이니 제임스는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불과 이틀 뒤 유괴장소에서 4㎞ 떨어진 후미진 기찻길에서 제임스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산산조각 났다.

게다가 시신이 너무나 참혹한 상태로 발견되어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기차가 밟고 지나가서 시신은 두동강나 있었는데, 온몸에 파란색 페인트가 뒤집어 씌워져 있었고, 쇠파이프와 벽돌로 맞은 흔적, 발로 차인 발자국까지 시신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또한 사망원인은 ‘외부충격으로 인한 뇌손상’이었다. 즉 기찻길에 던져지기 전에 제임스는 이미 살해되었던 것이다.

너무나 잔인한 범행방법에 경찰은 소년들 배후에 납치를 지시하고 이후 직접 살해한 성인 공범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경찰은 일단 소년들을 찾는데 집중했고, 곧 10살인 로버트 톰슨, 존 베네블스를 붙잡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 큰 충격을 받았는데, 이것이 두 소년의 단독범행이었고, 이들이 제임스를 폭행하는 것을 38명의 어른이 연이어 목격했지만 모두 방치했기 때문이다. 두 소년은 폭력적인 편부/편모 밑에서 매를 맞으면서 자랐고, 부모의 방치 하에 오래전부터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밝혀진 이들의 범행동기는 ‘그냥요’였다.

영국법상 이들은 ‘형사미성년자’가 아니었기에 성인과 똑같은 재판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황색언론들은 이들을 ‘악마’라고 부르며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고, 재판 끝에 징역 10년형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8년 후 이들이 가석방되자 재소환된 사건의 기억으로 영국 사회는 또 한 번 홍역을 치러야 했고, 그 와중에서 존 베네블스로 지목된 무고한 청년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과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렇게 영국을 뒤흔들었던 ‘제임스 벌저’ 사건은, 영국을 CCTV 천국으로 만들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사회적 홍역 끝에 ‘안전’을 외치면서 영국은 선진국들 중 유일하고 이례적으로 수많은 CCTV를 설치했다. 2006년경에는 전세계 CCTV의 20%가 영국에 설치되어 있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CCTV를 ‘도배’했음에도, 영국의 전체 범죄지수는 낮아지지 않았다. 강력범죄에 국한해 살펴보더라도, 대표적 강력범죄이고 암수범죄가 거의 없는 살인범죄를 보면, 2018년 10만 명당 살인비율이 우리나라는 0.6명, 영국은 1.2명이다. 런던에는 서울보다 인구수 대비 16배 더 많은 공공 CCTV가 설치되어 있음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CCTV가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은 막연한 환상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위와 같은 통계를 보면, 더 안전하려면 CCTV가 아니라 다른 곳에 돈을 쓰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점도 말이다.

작년 8월 이른바 수술실 CCTV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2년이라는 유예기간을 두고 현재 정부는 시행규칙 제정을 위한 준비작업 중이다. 응급수술, 위험도 높은 수술, 전공의 수련을 현저히 저해할 우려가 있는 수술 등은 환자 등의 요청이 있더라도 촬영을 거부할 수 있도록 의료법이 명확히 선언하고 있다. 그럼에도 의료현장에 구체적인 행위기준을 제시할 시행규칙은 어떤 면에서는 더 중요하다.

길거리를 CCTV로 도배하는, 인권에는 무관심한 중국조차 수술실 내에는 CCTV를 설치하지 않는다. 매년 10만 건 이상의 의료과오소송이 제기되는(우리는 1800건) 미국조차 수술실 내에 CCTV를 의무화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CCTV가 안전을 보장한다’는 비효율적인 환상을 좇아 입법은 이미 이뤄졌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의료인이 응급수술이나 위험도 높은 수술을 기피하게 된다면, 우리가 받게 될 미래의 진료를 책임질 전공의들의 수련에 지장이 생긴다면, 국민이 치러야 할 환상의 대가는 효율의 문제로 저울질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정부는 의료현장이 위축되지 않도록 의료계의 목소리를 경청하여 섬세하게 수술실 CCTV 관련 시행규칙을 제정해야 한다. 외과 전공의 수련기간을 3년으로 단축했음에도 여전히 많은 수련기관이 미달인 우리 현실을 직시하고, 제임스 벌저와 영국이 가르쳐 준 것을 되짚어 보면서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