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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가 뭐길래
담배가 뭐길래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01.18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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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45)

‘겨레의 늠름한 아들로 태어나 조국을 지키는 보람찬 길에서’로 시작하는 군가가 있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이 가사를 썼다는 ‘전우(戰友)’라는 이 노래를 군대 다녀온 대한민국의 남성 중에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2절 첫머리에 나오는 “한 가치 담배도 나눠 피우고”란 구절이 논란이 됐었던 적이 있나 보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함께 나누는 끈끈한 전우애를 비유로 묘사한 가사다. 하지만 군인들에게 흡연을 조장한다는 혐의를 받고 공군에서는 2010년 이후 10대 군가 목록에서 빠졌고 육군에서도 1절만 부르게 했다는 설이 있다.
  
군가 ‘전우’보다 훨씬 오래전인 1950년대에 만들어진 곡으로 ‘전우야 잘 자라’란 노래도 있다. 가수 현인이 부른 대중가요였지만 장중한 멜로디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란 비장한 가사로 인해 군가 대접을 받았는데 여기에도 담배가 등장한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란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국방부 로고가 찍힌 군용 담배 ‘화랑’은 치열한 한국 전쟁의 포화 속에서 곧 전사하게 될지도 모르는 전우와 어쩌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나누는 짧은 안식의 매개체였으리라.
  
군대와 담배의 애틋한 관계는 군가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대학교에 막 들어갔을 무렵 남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성남에 있는 학생중앙군사학교, 다른 말로 ‘문무대’라 불리던 곳에 들어가 일주일씩 병영집체훈련을 받아야 했다. 각개전투, 화생방, 사격 등등 고된 군사훈련으로 심신은 순식간에 피폐해졌다. 훈련 사이사이 잠시 쉬는 시간마다 조교들은 매번 “이제 담배 한 대 피고 10분 뒤에 다시 모입니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휴식 시간을 당연히 담배 피우는 시간으로 여기는 말투였다. 신기한 것은 그 말이 끝날 때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고3 수험생의 금욕 생활에 익숙하던 대학 새내기들이 마치 마법사의 주문에라도 걸린 듯이 한 무더기씩 생애 최초 흡연의 길로 들어섰다는 점이다.
  
담배를 곧 우정과 안식을 위한 유용한 도구이자 나아가 멋스러움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던 앳된 나이의 ‘초보 스모커’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담배를 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무섭도록 빨리 흘렀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어느덧 수십 ‘갑년(pack year)’의 관록을 자랑하는 ‘헤비 스모커’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마침내 폐암을 비롯하여 흡연과 관련된 각종 질병의 공포가 밀려오자 어쩔 수 없이 금연을 고려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게 그렇게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작년에 병원 정문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아파트 상가 계단에서 우리 환자가 넘어졌다는 신고가 들어와 크게 놀란 적이 있다. 환자복을 입은 채로 팔에는 주삿바늘을 꽂은 상태에서 폴대를 끌고 병원 밖을 배회하다 넘어져 머리가 깨진 그 암 환자는 알고 보니 담배를 사려고 주변 편의점을 찾아 나섰던 것이라고 했다. 암에 걸렸어도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욕구가 사그라지지 않았기에 결국 무리한 일탈을 감행했고 그 결과는 낙상에 의한 뇌출혈이라는 참사였다.
  
병원 내부는 어디나 금연구역이다. 다만 우리 병원에서는 장례식장 앞쪽으로 자그마하게 일부 경계를 정하여 흡연 장소를 정해놓고 있다. 이곳이 실외이고 병원 본관에서 거리가 제법 있다 보니 불법적인 흡연 행위가 도무지 근절되지 않는다. 직원들은 물론이고 환자들마저 으슥한 곳에서 담배를 피우는 경우가 종종 목격되는 걸 보면서 새삼 니코틴 중독의 강력함을 체감한다. 금연 문구와 벌금 경고를 곳곳에 붙이며 다양한 계도를 시도하지만 역부족이다. 담배를 입에 문 환자에게 금연해달라 말하면 역정을 내면서 오히려 병원 경계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다 보니 담배 사러 갔다가 낙상을 입는 환자도 나오는 것이고.
  
개인의 의지만으로 금연에 성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니코틴 중독에서 갑작스럽게 벗어나려 할 때 찾아오는 금단증상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병원마다 금연 클리닉을 개설하여 환자에게 상담과 함께 약물치료를 하거나 껌, 사탕, 패치 형태의 니코틴 제제를 투여함으로써 금연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금연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나약한 의지력만을 탓하지 말고 한시바삐 금연 클리닉을 방문하는 게 최선이다. 그런데 눈곱만큼의 금연 의지도 없이 자포자기 상태에서 흡연에 몰두하는 암 환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흡연자들이 암에 걸렸을 때 당연히 담배를 끊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국내 연구 결과를 보면 이들 중 절반 이상이 계속 흡연한다. 치료에 악영향을 주고 이차 암 발생이나 암 재발의 위험을 높이니 속히 금연하라고 강권하기에 앞서 이들에게 암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싶다. 니코틴이 가져다주는 찰나의 안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완치에 대한 희망이 쑥쑥 움튼다면 금연은 부수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요즘은 암 환자들의 흡연 문제는 일반 직원들의 금연 유도 방식과 달리 접근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과거에 담배에는 낭만적인 측면이 제법 있었다. 국방부의 열렬한 지원도 좀 있었던 것 같고 줄담배를 피는 영화 속 멋진 주인공들도 많았기에 흡연자들이 대거 생겨났다. 그러나 차츰 담배의 해악이 널리 알려지면서 골초들은 이내 설 자리를 잃었다. 니코틴 중독의 무서움과 금연 과정의 고통을 생각하면 아예 처음부터 흡연자가 되지 않는 게 상책인 듯하다. 청소년용 ‘노담 캠페인’처럼 말랑말랑한 금연 공익광고도 많이 나오지만 아직은 흉측한 담뱃갑의 폐암 환자 사진처럼 이른바 ‘공포 마케팅’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으니 스포일러란 비난을 무릅쓰고 단편소설 하나를 소개한다. 
  
스티븐 킹이 1978년에 쓴 <금연주식회사(Quitters, Inc.)>. 마치 ‘오징어 게임’의 도입부처럼 주인공이 명함 하나 받아들고 찾아간 이 회사의 금연 서비스는 성공확률이 100%다. 금연 약속 이후 이를 어기면 부인을 납치하여 전기고문을 한다. 또 흡연하다 걸리면 이번엔 아들을 잡아다 구타하고 고문한다. 그래도 금연하지 못하는 2%는 총으로 쏴버려서 마침내 금연 100%를 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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