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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물할 때 없는’ 영어
‘나물할 때 없는’ 영어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01.11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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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44)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Korea Cancer Center Hospital, 약자로 ‘KCCH’. 이게 우리 ‘원자력병원’의 공식 영문명이다. 한글과 전혀 맞지 않는 기이한 번역이지만 이상한 점은 내용이 아닌 형식에도 있다. 영어로 논문 쓰는 법을 가르치는 교과서에는 명사가 명사를 수식하는 표현을 되도록 피하라는 조언이 꼭 등장한다. 예컨대 ‘당뇨병 환자’를 ‘diabetes patient’라고 기술하는 것보다 ‘patient with diabetes’, 혹은 아예 형용사형을 써서 ‘diabetic patient’로 쓰라고 미국 의사협회에서 발행한 논문작성 지침서, <Manual of Style>은 권고한다. 명사가 두 개만 잇달아도 불편한데 우리 병원 영문명에는 무려 네 개의 명사가 줄지어 등장하니 원어민들이 읽을 때 상당히 어색하고 거슬릴 게 틀림없다. 
  
애초에 원자력연구소의 부설 기관으로 출발했기에 병원 명칭에도 자동으로 ‘원자력’을 넣게 됐지만, 그 단어가 지닌 은근한 부담을 우리 선배들은 인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문명에만큼은 ‘원자력’ 대신 우리가 주로 보는 질환인 ‘암(cancer)’을 명시하고자 했다. 이때 참고한 게 일본 국립암센터의 영문명이다. 거기는 전체 기관 명칭을 ‘National Cancer Center (NCC)’라 표기하면서 그 아래 세부 기구로 연구소(Research Institute), 병원(Hospital) 등을 두고 있었다. 미국 의사협회의 영어 논문작성에 대한 조언을 따랐다면 ‘Hospital of NCC’ 정도로 표기하는 게 자연스러웠겠지만 영어 의존도가 약한 일본 정서상 그냥 ‘NCC Hospital’이란 명칭을 쓰는 게 문제가 별로 안 됐다. 우리 선배들은 그걸 그대로 벤치마킹했던 걸로 보인다. 
  
순서가 좀 뒤바뀐 꼴이지만 이후 원자력병원의 조직 재편 과정에서 병원의 상위 기관으로 ‘한국원자력의학원’이 설립됐다. 영문 명칭의 이력을 돌이켜보면 뒤늦게 일본 NCC의 위상과 비슷한 ‘Korea Cancer Center (KCC)’가 생긴 셈이고, 일본처럼 그 아래에 병원과 연구소 등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원자력의학원’은 암 질환만을 연구하는 곳이 아니기에, ‘KCC’ 대신 확장된 미션인 ‘방사선 의학’에 두루 걸맞은 긴 영문명(KIRAMS)을 새로이 고안하게 되었고 직원들은 일관성 없는 영문 표기에 계속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있다.
  
영어 이름이 어색해도 특별히 뭐라 하는 사람이 없어서였을까. 한동안 우리 병원에서는 곳곳에 이상한 영어 표현이 만연했다. 직원들이 뭔가를 영문으로 번역해서 게시할 때 별다른 고민이 없었으니 인터넷 번역기를 돌린 듯 민망하고 해괴한 표지판이 속출했다. 예컨대 문이 두 개인 여닫이 출입문의 경우 한쪽을 고정해 놓는 경우가 많은데 고정문에는 ‘Fixed’라 적고 사용하는 문엔 ‘Used’라고 적어 놓았다. 마치 병원의 전체 문짝 중 절반을 ‘중고품(used)’으로 설치했다며 검소함을 자랑하는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Outpatient Inspecting Room’은 또 어떤가. 외래에서 피를 뽑아 검사를 진행하는 ‘외래 검사실’을 그렇게 표기했다. 병원의 검사실(Laboratory)이 순식간에 무슨 엄격한 인증심사(inspection)라도 하는 곳처럼 변신한 것이다. 심지어 병원 소개용 영문 책자에서는 진료부, 간호부 같은 병원의 ‘조직(organization)’을 ‘인체 조직’을 지칭할 때처럼 ‘tissue’란 단어로 바꿔놓은 기상천외한 번역도 한때 눈에 띄었다.
  
평소 맞춤법이나 오탈자에 특히 민감한 우리 진단검사의학과 선생님들은 병원에서 발견되는 그런 오류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일일이 문제점을 지적하며 즉각 시정할 것을 요구했는데 나는 그 과정에서 약간의 깨달음이 있었다. 물론 ‘타인의 관점에 좀 더 신경을 쓰자, 고객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 좀 더 세심한 관심을 가지자’하는 당위적 메시지를 직원들에게 다시 한번 던져주었다는 데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으나, 역설적으로 그 피곤한 ‘지적질’을 통해 ‘불완전함이 가져다주는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됐다는 뜻이다.
  
‘나물할 때 없는 완벼칸 사람’. 젊은 세대들이 일부러 사 입는 티셔츠에 그런 문구가 적힌 걸 본 적이 있다. 당연히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사람’을 잘못 쓴 말일 게다. 자신이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그런 오자투성이의 옷을 걸치고 다니는 것을 청년들은 일종의 ‘격식 파괴’나 ‘반전의 묘미’로 즐기는 듯하다. ‘불완전함’을 오히려 ‘재미’로 승화시키는 젊은이들의 기발함에서 ‘행복’으로 향하는 또 다른 비법을 배우기에 난 우리 과 선생님들에게 숨 막히는 ‘완벽주의’의 갑옷을 벗어버리고 때로는 이런 재미와 행복함에 동참해 보자 권하고 싶어진다. 그제야 우리 병원의 영문명을 비롯하여 지난날 우리 기관에 출몰했던 희한한 영어 표현들이 ‘나물할 때 없는’ 영어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Not Biggest, But Best’. 오랜 세월 우리 직원들이 차량에 붙이고 다녔던 주차 스티커에 담긴 문구다. ‘최고로 큰 병원은 아니지만, 최고로 진료 잘하는 병원’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난 이걸 처음 봤을 때 최상급 영어 형용사 앞에 꼭 들어가야 할 정관사 ‘the’가 빠진 게 몹시 불편했다. 구글 검색에도 등장하지 않는 또 하나의 원자력병원식 영어 표현이었다. 아울러 ‘not A but B’는 단순히 ‘A가 아니라 B’란 숙어기에, ‘비록 가장 크지는 않지만’이라는 양보의 뉘앙스를 담으려면 문구 앞에 ‘Although’ 같은 접속사를 집어넣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이제 이 또한 ‘나물할 때 없는’ 영어의 관점에서 보기로 했다.
  
‘사람’이란 단어에 등장하는 ‘미음(ㅁ)’ 받침의 모서리를 오랜 세월 동안 갈고 닦으면 ‘이응(ㅇ) 받침이 된다고 한다. 그제야 비로소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뜻인데 나는 ‘나물할 때 없는’ 영어 학습을 통해 그런 경지에 조금씩 도달해 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 기관의 여러 불완전한 부분까지 너끈히 사랑할 수 있게 될 때 그런 애정이야말로 진정한 효과를 발휘하는 개선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역시 티셔츠 문구를 통해,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거친 뒤 조금씩 개선을 이룸’을 일컫는 듯한 속담이 있음을 최근에 알게 됐다. ‘소 잃고 뇌 약간 고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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