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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행복했습니다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12.28 09: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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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준의 공릉역 2번 출구 (42)
홍 영 준원자력병원장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청담보살>이란 제목의 한국 영화가 있다. 2009년에 나온 코미디로 청담동에서 잘 나가는 젊은 여성 무당이 주인공이고, 이 용한 무당의 남편이 될 운명을 타고난 남자로 배우 임창정이 등장한다. 영화에서 임창정의 본래 직업은 경마장에서 매일 말 소변을 깡통에 받아 도핑 테스트하는 곳에 넘겨주는 일이었는데 무당을 만난 뒤로는 그녀의 점술 카페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아르바이트생으로 변신한다. 어느 날 괴한이 그 점술 카페의 유리창을 깨고 달아났을 때 기어이 그를 쫓아가 붙든 임창정. 일단 괴한을 중국집으로 끌고 가 음식을 사 먹이며 무슨 사연인지 들어보려는 순간, 웨이터가 시키지도 않은 친절을 베푼다. 갑자기 단무지에 식초를 잔뜩 뿌려주는 것이다. “단무지는 식초를 쳐야 제맛이죠”란 문장을 포함해서 우물우물하는 웨이터의 대사는 딱 세 마디. 그것도 짜증 내는 임창정의 고함에 다 묻혀 버린다.

얼마 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개그맨 김철민 씨의 지난 이력들을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그가 출연한 단 한 편의 영화가 <청담보살>임을 알게 됐을 때, 나는 만사 제쳐놓고 그 영화를 찾아 단숨에 다 보았다. 그런데 전체 두 시간 중 김철민 씨는 영화 시작 한 시간 삼십 분이 지나서야 이름도 없는 중국집 웨이터로 등장했고 분량도 고작 30초 남짓이었다. 그걸 ‘대표작’으로 적어넣은 그의 이력이 코믹하여 슬며시 미소가 피어올랐지만 그래도 투병할 때와 달리 젊고 건강한 그의 얼굴을 잠시나마 볼 수 있어 좋았다. 오지랖 넓은 친절을 베푸는 영화 속 웨이터의 모습은 아마 그의 평소 심성과 닮았으리라.

개그맨 김철민 씨의 이름을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폐암 치료 목적으로 개 구충제인 ‘펜벤다졸(fenbendazole)’을 복용해 크게 효험을 보고 있다는 그의 주장을 언론이 떠들썩하게 보도하던 때다. 2019년 8월에 그는 우리 병원에서 간과 뼈에 전이가 있는 폐암 4기 판정을 받고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는데 어찌 된 셈인지 이렇게 교과서적인 치료의 효과에 대한 언급은 쏙 빠진 채 그해 10월부터 그가 임의로 복용한 개 구충제 이야기만 장안의 화제가 됐다. 동물 몸속에 존재하는 기생충 역시 세포분열이 왕성하므로 그걸 억제하는 약제가 암세포의 세포분열도 억제하리라는 가설이었다. 하지만 일부 실험실 데이터만 있을 뿐 제대로 된 임상시험 결과는 찾아볼 수 없는 상태에서 김철민 씨가 주장하는 개 구충제의 과장된 항암 효과가 유튜브 등으로 무분별하게 퍼져나가는 상황을 우리 의료진은 크게 염려했었다.

결국 펜벤다졸을 복용한 지 1년이 조금 못 되어 몸 상태가 점점 나빠지기 시작하자 김철민 씨는 개 구충제 복용을 완전히 중단했다. 뭔가 깨달음이 있었던 듯 그는 2020년 10월 국회의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장에 보낸 영상 메시지를 통해 “검증되지 않은 대체요법의 위험성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란 의외의 증언을 했고 의료진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개 구충제를 둘러싼 논란은 다행히 일단락됐지만 나빠진 김철민 씨의 건강 상태는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2021년 8월 그는 병상에서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는데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거친 숨만 몰아쉬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중에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 올린 이 침묵 영상의 제목은 ‘이별의 시간이 오고 있네요’였다.

한편 자신의 항암 치료 과정과 투병 의지를 SNS를 통해 소상히 알리는 김철민 씨에게 많은 이들이 응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건강했던 시절 대학로에서 노래 부르던 그의 열정적인 모습이 방송에 소개되고, 부모님과 형 등 많은 가족 구성원들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애달픈 가족사까지 알려지면서 그를 향한 응원의 목소리는 실제 물질적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때마다 감사함을 전하면서 김철민 씨가 인터넷에 올리는 병상 사진에는 항상 원자력병원 마크가 큼직하게 찍힌 베개가 등장하곤 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나를 포함하여 다수의 우리 병원 직원들 역시 그 응원의 대열에 자연스럽게 동참했다. 하지만 쾌유를 바라는 주변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를 뒤로 한 채 2021년 12월 16일 김철민 씨는 우리 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54세로 눈을 감았다. 세상을 떠나기 6일 전 그의 마지막 SNS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교회에서 고등학생 부서를 오래 맡아왔던 나는 매년 연말이면 돌아오는 교회학교 졸업 예배 때마다 교사들을 대표해서 축하와 격려의 메시지를 졸업생들에게 전하곤 했다. 올해는 이 자리에서 프랑스 화가 폴 고갱의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인생의 단계들을 하나하나 매듭지을 때마다 이 질문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자고 했다. 문명을 등지고 말년을 남태평양 타히티에서 보낸 고갱은 이 그림을 마치 유언처럼 그렸다. 갓 태어난 아기와 죽음을 기다리는 노파가 좌우로 배치되고 그 가운데에 마치 인생의 의미를 찾는 듯이 열매를 따려는 몸짓의 사람이 있다. 인간을 유혹하는 우상의 모습도 보인다. 들여다볼수록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그림이고 또 질문들이다.

이 작품을 끝낸 직후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던 고갱은 어쩌면 스스로 던진 질문들에 대해 허망한 답변을 찾아낸 게 아닌가 의심된다고 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그러니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는 여기에 대한 답변을 먼저 성경에서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수반되어야 하는 일인지 나는 안다. 혹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고갱의 질문들이 잘못 출제된 시험문제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잠시 심오한 진리를 찾는 일을 접어두고 그냥 도움이 필요한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게 눈을 돌려보는 건 어떨까. 삶의 마지막 순간, 서로가 서로의 크고 작은 배려에 감동하여 곳곳에서 ‘덕분에 행복했습니다’란 고백이 넘쳐난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인생들이 모인 소중한 공동체가 아닐까. 비록 각자의 방향성과 정체성은 좀 모호하다 해도 말이다. 젊고 건강했던 김철민 씨가 단무지에 식초를 듬뿍 뿌려주던 영화 속 장면도 그런 취지였을 걸로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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