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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이란다. 이런 젠장”
“암이란다. 이런 젠장”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11.2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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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준의 공릉역 2번 출구 (39)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서른 살의 잘생긴 우체부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넘어진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뇌종양이라고 한다. 그것도 남은 시간이 불과 얼마 안 된다는 말기 암이었다. 망연자실한 그의 앞에 자기와 얼굴이 똑같이 생긴 의문의 남자가 나타나 바로 다음 날이면 그가 죽을 것이란 말을 한다. 이 의문의 남자는 자신을 악마라 불러도 좋다면서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기이한 방법을 일러준다. 자기가 세상에서 뭔가를 하나 없애버릴 텐데 그걸 견디면 하루의 삶을 더 얻을 수 있다는 것. 그의 말대로 다음 날 세상에서 별안간 전화가 사라지고 우체부 청년의 삶은 하루 연장된다. 그다음 날은 영화가 없어지고, 그다음 날은 시계가 없어지며, 그다음 날은 세상의 모든 고양이가 사라질 위험에 처한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이란 2016년 일본 영화 이야기다. 암 진단을 받는 초반부가 워낙 급작스러워서 처음엔 주인공의 슬픔에 공감이 잘 안 됐다. 하지만 전화가 없어지니 한 통의 잘못 걸린 전화에서 시작된 첫사랑의 추억이 사라지고, 영화가 없어지니 영화 같은 삶을 동경하며 절친과 매일 나누던 대화가 끊어지고, 시계가 없어지니 아버지가 운영하던 시계점이 종적을 감추면서 자신이 간직해 왔던 기억들이 송두리째 흔들린다는 영화의 기둥 줄거리는 우리가 지금껏 살면서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소중한 것들이었나 돌아보게 해준다. 존재가 사라지고 나서야 마침내 그 가치를 깨닫는 어리석음을 우린 얼마나 반복하면서 살아가는지. 

현대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했다지만, 역설적으로 주변에서 암이란 질병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크게 늘고 있다. 조기진단이 점점 더 활발히 이루어지는 한편, 적극적 치료를 통해 암 생존율 또한 매우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기대수명이라는 83세까지 살게 될 때 암에 걸릴 확률은 37%가 넘고, 암에 걸려도 5년 이상 생존할 확률이 70%까지 이른다고 한다. 다만 통계는 통계일 뿐, 그 숫자가 남이 아닌 내게 적용될 때도 담담하게 동요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설령 생존 가능성이 99%라 하더라도 나머지 1%라는 수치가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게 암 진단을 받는 당사자들이 겪게 되는 두려움이다.

나는 한때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병원의 몇몇 환자들이 느끼는 상대적 안도감을 가끔 이야기한 적이 있다. 세상에서 본인이 가장 심각한 암에 걸렸다고 생각되어 우울하고 괴로웠는데, 막상 원자력병원에 와보니 병동에 훨씬 더 중한 암 환자들이 많은 걸 보고 다시 용기를 내어 투병 의지를 다졌다는 일부 환자의 말을 과장되게 전한 것이다. 우리 의료진이 중증도 높은 암 환자 진료 경험이 많다는 점을 은근히 강조하려는 의도였지만 돌이켜보면 매우 경솔한 발언이었다. 암 진단을 받은 분들에게 치료 기간 내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고통과 공포의 크기는 의학적 병기(病期)에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최근 연이어 암 통보를 받은 사랑하는 우리 일가친지들을 보면서 뒤늦게 깨닫기 때문이다.

미리엄 엥겔버그는 마흔세 살이던 2001년에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비영리기관 웹사이트에 카툰을 이따금 그려 올렸던 경력을 살려 그녀는 암 진단을 받은 뒤 암과 함께 살아가는 자신의 일상을 만화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삶의 진실은 무겁고 심각하고 고상한 데 있는 게 아니라 한없는 가벼움에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최대한 낙천적이고 사소하게 묘사하고 싶어 만화라는 형식을 택했나 보다. 그 만화들은 나중에 책으로 만들어져 ‘암은 나를 훨씬 얄팍한 사람으로 만들었다(cancer made me a shallower person)’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국내에서는 암을 통보받았을 때 그녀가 보였던 첫 반응, “암이란다. 이런 젠장”을 한국어판의 제목으로 택했다.

미리엄의 그림은 매우 단순하고 어떻게 보면 좀 성의 없는 펜 놀림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담담한 어투로 이어가는 이야기들, 즉 항암치료 후 여러 색깔의 가발을 고르는 일, 꺼져버린 욕망을 되살려 보고자 성인용 비디오 가게를 찾는 일, 형식적인 위로나 일방적인 전도를 일삼는 사람들을 슬그머니 비판하는 일 등등은 그 사소함과 침착함으로 인해 오히려 독자들의 마음이 더 아려온다. 투병 6년째인 2006년 미리엄은 유방암 전이로 인해 마침내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과 영원한 이별을 하고야 만다. 차라리 “암이라니, 젠장” 하고 나서 격정적 분노가 폭발하거나 통곡이 터져 나왔으면 덜 안타까웠을 것을.

가까운 이들의 암 진단 소식은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전이된 췌장암처럼 극도로 예후가 좋지 않은 암은 물론이고 유방암이나 갑상선암과 같이 진행이 느리고 치료 성적이 양호하다고 알려진 암들에서조차 당사자들은 순간순간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로 인해 예외 없이 힘겨워하는 것을 본다. 희망의 상실, 관계의 실종, 마침내 존재의 소멸. 그 가공할 악몽 앞에 형식적인 위로의 말은 설 자리가 없음을 깨닫는다. 항암치료를 받는 딸에게 눈물을 참으며 가발을 사다 주는 엄마, 숫자가 빼곡한 검사 결과지에서 하나라도 긍정적인 걸 찾아내려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는 남편, 그리고 그 병을 가장 잘 치료하는 의사가 누군지 찾기 위해 온종일 인터넷을 뒤지는 가족들. 나는 그분들에게 섣부른 낙관의 메시지는 전하지 못하겠다. 그저 시간이 흐르다가 혹시라도 어느 날 극한의 상황에 도달한다면,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의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독백을 함께 나누고 싶을 뿐.

“이루지 못한 꿈과 생각, 사는 동안 못했던 일, 남겨둔 일. 분명 수많은 후회가 남을 겁니다. 하지만 내가 있던 세상과 내가 사라진 세상은 분명 다르리라 믿고 싶어요. 정말 작은 차이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이야말로 내가 살아온 증거니까요. 몸부림치고 고민하며 살아온 증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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