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7:59 (금)
잡담(雜談)의 효능
잡담(雜談)의 효능
  • 의사신문
  • 승인 2021.11.16 09: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영준의 공릉역 2번 출구(38)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기업체는 물론이겠지만 병원 경영진을 포함하여 의료계 곳곳에도 ‘회의주의자’가 많다. 끊임없는 의심을 통해 과학을 발전시킨 분들처럼 유익한 종류의 회의주의자가 아니라,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그저 “우리 다 같이 일단 회의를 통해 중지를 모아봅시다”라는 식의 ‘회의(會議)’ 만능론자들 말이다. 조직 내에 온갖 ‘위원회’, ‘TFT’, ‘협의회’ 등등이 넘쳐나고 ‘검토 중’, ‘고려 중’이란 말이 유행어가 된 게 이들이 이룩한 큰 업적이다. 

책임회피가 주목적인 회의에서는 오가는 대화가 건조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지루하게 시간을 끌어도 그 결론이 어떤 근본적인 변화를 끌어내기에 역부족일 때가 많다. 특히 몇몇 ‘빅 마우스’들만이 열변을 토하는 회의일수록 나머지 참석자들은 더욱 본심을 드러내지 않고 냉소적 태도로 일관하는 경향을 보인다. ‘혁신’은 고사하고 ‘구태’와 ‘적폐’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어쩌면 우리의 잘못된 회의문화에 있지 않나 의심하게 되는 이유다. 기껏 회의는 하는데 소통이 없으니 말이다.

예전에 휴게실로 쓰였던 우리 병원 의사연구실 맨 끝 방은 바둑판이 몇 개 놓여 있어서 한동안 병원 내 기원(棋院) 같은 역할을 했다. 주로 바둑을 좋아하는 의사들이 모였지만 누군가 급히 찾을 때 그리 달려가면 쉽게 만날 수 있으니 이내 이 사람 저 사람 북적이는 사랑방이 되었다. 바쁜 의사들이 둘러앉아 한가로이 바둑 두고 잡담 나눌 겨를이 어디 있느냐고 그 사랑방을 다소 못마땅한 눈으로 보는 사람도 물론 있었으나 신기하게도 그곳이 붐빌수록 거기서 오가는 잡담 속에 환자에 대한 정보 공유도 덩달아 자연스레 일어났다. 비록 일정을 잡아 세미나실에서 개최하는 정식 집담회(conference)처럼 엑스레이 사진이 걸리거나 병리 슬라이드 프리젠테이션이 있지는 않았지만, 환자를 위해 꼭 필요한 이야기들은 매우 우호적인 휴게실 분위기 속에서 쉽게 교환되곤 했었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우리 핵의학과에 오래 근무하셨던 시니어 여자 과장님 한 분은 일 년에 한두 차례씩 원내 여의사들을 소집해서 저녁을 사셨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이분이 야심 차게 쏟아놓는 레파토리는 예로부터 원자력병원 직원들 간에 있었던 ‘남녀상열지사’였다. 이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했던 우리 과 여선생님은, 마치 파마하러 미용실에 갔다가 그곳에 쌓인 여성잡지들을 탐독하여 갑자기 최신 연예가 뉴스에 정통해서 오듯, 거기에 다녀올 때마다 원자력병원 연애사(戀愛史)를 꿰고서 돌아왔다. “우리 병원이 그야말로 사랑이 꽃피는 병원이었네요” 하며 내게도 맛보기로 몇 개 살짝 알려 주는데, 이건 뭔가 은밀한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별안간 커진 새내기 행동대원 같은 분위기였다. 어쩌면 그 시니어 여자 과장님이 노린 게 그런 거였을지 모르겠다.

모여서 즐겁게 바둑두던 의사 휴게실은 사라졌고, 현란한 말솜씨를 자랑하던 핵의학과 여 선생님도 퇴직하신 지 오래지만, 그런 경험을 통해 잡담의 효능을 이해하게 된 나는 병원장실은 좀 어렵더라도 이제 우리 진단검사의학과의 판독실만큼은 편안하게 잡담이 오가는 사랑방 역할을 하기 기대한다. 판독실 한쪽에서는 우리 과 전문의가 열심히 현미경을 들여다보면서 말초혈액이며 골수 소견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지만 정작 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진단 정보나 추가 검사에 대한 권고는 보고서상의 활자나 형식적인 전화 통화에서보다 판독실에 찾아온 주치의와 차를 한 잔 나누며 잡담하는 가운데 훨씬 효과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과 전문의들은 커피 마시는 것과 군것질을 대단히 좋아해서 테이블 위에 맛있는 커피와 다양한 간식거리들이 끊일 날이 없다. 한번 판독실에 들렀던 타과 선생님들은 커피를 좋아하는 우리 과 사람들의 취향을 알아차리고 갓 볶은 커피를 곧잘 보낸다. 심지어 에스프레소 머신을 선물한 선생님도 있는데 수시로 찾아와 ‘바리스타’임을 자처하며 본인이 직접 에스프레소를 뽑아 준다. 차와 간식에 더하여 유명인들의 불륜 스토리 같이 자극적인 이야기 수집이 취미인 우리 과 선생님도 있으니 잡담을 위한 만반의 준비는 다 되어 있는 셈이다. 

나는 요즘 부쩍 병원장실에서보다 우리 과 판독실에서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 많아졌다. 왠지 핵심 용건만 간략히 이야기하고 곧바로 나가버려야 할 것 같은 딱딱한 분위기의 병원장실보다는, 새로 익힌 취미나 맛있는 식당, 혹은 비장의 재테크 이야기까지, 맥락도 없고 중요한 내용도 없으며 정리도 잘 안 되는 잡다한 이야기들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고 싶어지는 우리 과 판독실에서 업무용 대화를 나누는 게 때때로 훨씬 유익함을 깨닫기 때문이다. 별 다방, 콩 다방과 어깨를 견줄만한 판독실 카페, 곧 ‘판’ 다방이라고나 할까.

일본 메이지 대학의 사이토 다카시 교수가 쓴 <잡담이 능력이다>라는 책이 있다. 그는 잡담을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 분위기를 띄우는 힘’이라고 말한다. 잡담은 본래 알맹이가 없는 이야기, 그러니까 용건이 없는 대화로서 굳이 뭔가 결론을 내릴 필요가 없단다. 같은 장소에 있는 사람들과 분위기를 공유하기 위해 잡담이 존재하며 말솜씨가 좋은 것과는 다르다고 한다. 한 마디로 ‘잡담은 대화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란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조직의 실패를 줄이는 의사결정의 전제는 구성원 간의 충분한 소통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회의’라는 행위를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회의 시간에 오히려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경험한다. 이 역설을 깨기 위해 ‘잡담’이 필요하다. 평소에 좀 더 활발하게 알맹이 없는 이야기를 하자는 거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분위기 파악을 하는 것이고. ‘배달의 민족’이란 앱을 운영하는 ‘우아한 형제들’의 사훈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잡담을 많이 나누는 것이 경쟁력이다.’ 단 1초의 시간 낭비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배달 업체가 잡담을 낭비가 아닌 경쟁력으로 보고 있다니. 엄숙주의가 만연한 병원도 거기서 배울 점이 있지 않겠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