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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란지교(芝蘭之交)를 부러워하며
지란지교(芝蘭之交)를 부러워하며
  • 의사신문
  • 승인 2021.10.26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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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준의 공릉역 2번 출구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이런 희한한 게 네이버에 올라왔네요.” 우리 정형외과 선생이 인터넷에서 캡처한 사진을 불쑥 내밀었을 때 난 반사적으로 긴장이 됐다. 혹시 누군가 병원에 대해 무슨 민원이나 항의성 글을 올렸나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직장인들이 회사에서의 불만을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마구잡이로 쏟아낼 수 있는 익명 게시판이 인터넷 여기저기에 활성화되어 있고, 환자와 보호자들 또한 병원이나 의사에 대해 서운한 점들을 토로할 수 있는 온갖 커뮤니티에 가입하고 있지 않은가. 긍정적인 장문의 기사보다 부정적인 짧은 댓글 하나를 막는 게 병원 홍보에서 훨씬 중요할 때가 많으니 인터넷상에서 원자력병원과 관련된 글이라면 사소한 것이라도 꼼꼼하게 챙겨볼 수밖에. 

  
다행히 그가 보여준 것은 ‘지식iN’이라는 일종의 온라인 ‘Q&A’ 게시판 중 의료상담 코너에서 우리 병원 정형외과 의사에게 답변을 요구하는 질문이었다. “정형외과 의사가 된다면 트와이스 사나랑 결혼할 수 있나요? 사나는 저보다 훨씬 누나지만 그래도 상관없어요.” 인기 아이돌 그룹 ‘트와이스’의 멤버 중에 ‘사나’라는 이름의 일본 소녀가 있다는 걸 난 그때 처음 알았다. 어쨌든 초등학생으로 추정되는 아이의 자못 진지한 질문에 뭐라도 반응은 해주어야 할 것 같아 고심했던 우리 정형외과 선생의 답변은 이랬다. “희망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근데, 열심히 공부하셔야 합니다.”
  
인기 많은 정형외과를 조금 부러워하면서 미소와 함께 그냥 넘길 수 있었던 귀여운 에피소드였다. 하지만 우리 같은 정부산하 공공기관들은 언론이나 SNS 등에 불쑥 올라오는 기사 하나, 사진 한 장으로 인해 자칫 국정감사 같은 자리에서 억울하게 질타를 받다가 언제든 예산이 삭감되는 불상사까지 생길 수 있기에 인터넷에 대한 모니터링은 한시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그러니 며칠 전 수간호사 한 분이 “죽으면 관에 간호사복 넣어줘요”라는 자극적 제목이 붙은 인터넷 신문 기사를 내게 보내줬을 때 과로에 지친 간호사들이 항의하는 건가 하고 잠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번 역시 기우였다. 그 기사는 37년간 우리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내년 정년퇴직을 앞둔 세 분 수간호사들의 이야기였다. 외과에서 수술 부위 상처 치료와 장루 관리를 담당하는 우리 처치간호팀 수간호사의 남편이 부인에 대한 애틋한 사연을 한 메이저 신문사에 보냈고 그게 덜컥 채택된 것이다. 그 신문사에서는 직접 찾아와 세 명의 절친 수간호사들을 모델로 병원 곳곳에서 멋진 흑백사진을 찍어 주고 기사를 통해 이들의 평생 우정을 자세히 다뤄 주었다. 신문사에서는 그걸 ‘인생 사진 찍어 주기 프로젝트’라고 명명하고 있었다.
  
노래 제목은 정확히 모르지만 몇 마디 멜로디만 들으면 누구나 ‘아, 이 노래’하면서 무릎을 치게 되는 음악들이 있다. ‘아듀 졸리 캔디(Adieu Jolie Candy)’라는 프랑스 노래도 그런 곡 중 하나다. ‘아듀’는 물론 ‘잘 가’란 뜻이고 ‘졸리’는 ‘귀여운’ 혹은 ‘예쁜’이란 뜻의 프랑스어다. 프랑스에 놀러 온 발랄한 영국 아가씨 ‘캔디’에게, 그녀와 잠시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프랑스 남자가 공항에서 이별하며 부르는 노래다. 이 노래를 ‘프랑크 푸르셀(Frank Pourcel)’ 악단이 연주곡으로 편곡한 걸 옛 유명 DJ 이종환이 자기가 진행하던 <밤의 디스크 쇼>의 시그널 음악으로 가져다 썼다.
  
이른바 ‘386 세대’ 중에는 80년대를 풍미했던 심야 음악 프로그램 <밤의 디스크 쇼>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을 것이다. 지금도 그 시그널 음악을 틀어놓으면 단박에 옛날로 시간이 되돌아가는 듯하다. 젊은 날, DJ 이종환씨 덕에 팝송 지식도 좀 넓어졌지만 난 그보다 그 프로그램에서 가끔 낭송해주던 수필들이 참 좋았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로 시작하는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도 굵직한 이종환씨의 목소리로 처음 접하게 된 작품이었다.
  
산삼 못지않은 신비의 약초라는 ‘지초(芝草)’와, 절개와 충성의 상징인 ‘난초(蘭草)’. 둘 다 그윽한 향기를 간직하고 있기에 ‘지란지교’는 ‘깨끗하고 고고한 벗 사이의 사귐’을 일컫는다. 명심보감에 등장하는 이 사자성어를 유안진 시인은 아름답고 진솔한 자신의 언어로 바꾸어 보석 같은 수필을 탄생시켰다. 젊은 시절, 아직 종이로 된 편지가 명맥을 잇고 있을 무렵 난 ‘지란지교를 꿈꾸며’의 구절들을 정성껏 편지지에 담아 친구와 동료, 선후배들에게 보냈었다. 내 삶에도 그와 같은 사귐이 있기를 기원하며 한 줄 한 줄 펜으로 편지지에 옮길 때, 머릿속엔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 시그널 음악이 무한 재생되고 있었다.
  
온갖 풍파를 다 겪으며 37년을 한결같이 같은 직장에서 우정을 쌓아온 세 사람의 수간호사들. 그들은 모두 간호사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입었던 간호사 유니폼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검진센터 수간호사가 옛날의 그 복장으로 사진 찍은 게 없어 아쉽다고 말했을 때, 남편이 사연을 신청했던 우리 외과 수간호사가 한 마디 툭 던졌단다. “난 나중에 관속에 그 옷을 넣어달라고 했어요. 남편과 아이들에게 부탁해 두었어요.” 인터뷰했던 기자는 그 말을 기사 제목으로 뽑았고 난 그 말에서 <지란지교를 꿈꾸며>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동시에 이 수간호사 세 사람의 ‘지란지교’가 몹시 부러워졌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를 버티어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어주리라. 그러다가, 어느 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壽衣)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芝蘭)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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