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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적 사고의 300억 원 짜리 폐해
이분법적 사고의 300억 원 짜리 폐해
  • 전성훈 변호사
  • 승인 2021.10.13 1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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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38)

‘회색지대’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선과 악/정의와 불의/논리와 비논리 등 대립하는 양 개념의 중간지대를 뜻한다. 단어의 의미를 볼 때 아주 오래전부터 쓰였을 것 같지만, 이 단어는 불과 수십 년 전에 생겼다. 이는 현대 군사학이 전체 무기를 ‘전술무기’, ‘전략무기’로 구분하면서 이에 속하지 않는 무기를 ‘회색무기’에 비유한 것에서 유래했다.

  
물론 과거에도 어느 사회나 비슷한 의미의 단어들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개념을 명확히 표현하는 단어가 없다는 것은 그에 대한 관념이 없거나 희박함을 의미한다. 또한 과거 중화/오랑캐, 신자/이단과 같은 이분법적 사고가 실제로 세상을 지배했음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이분법적 사고가 강해질 때마다 사회는 큰 대가를 치렀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에 물든 ‘수정주의자’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마오쩌뚱의 선동에서 시작한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10년간 중국을 분열과 혼란에 몰아넣었고, 그 과정에서 2,000만 명이 살해당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가던 시기, 캄보디아는 이보다 더 심각한 이분법적 사고의 대가를 치렀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 같은 무장투쟁조직인 ‘크메르루주’를 이끌던 폴 포트는, ‘도시는 부패했고 농민은 오염되지 않았다’라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권력을 얻자 ‘썩은 사과는 상자 째로 버려야 한다’고 외치면서 300만 명에 달하는 도시 거주민들을 농촌으로 내려 보내 집단농장을 건설토록 명령했다. 이 과정에서 고학력자, 중산층, 관료 등은 ‘재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수용소에 끌려가 ‘안경을 썼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없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이렇게 불과 3년 6개월 동안 그는 750만 명의 국민 중 170만 명 이상을 살해했다.
  
과거로 가면 이런 이분법적 사고의 폐해는 더욱 극심했다. 미지의 바다로 나아가 신대륙을 발견한 진취적 탐험가로 포장되는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주민들에게는 잔혹한 침략자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상륙한 지역에 원래 살고 있던 타이노 족을 노예화했고, 그가 자리잡은 지 7년만에 타이노 족 인구는 800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줄었다. 스페인 침략자들이 타이노 족 아이들을 칼로 조각내어 키우는 개의 사료로 던져주었고, 타이노 족 노예가 지시한 금 할당량을 가져오지 못하면 손발을 잘랐던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십계명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는 백인 성직자가 ‘사람은 백인만을 가리킨다’라고 해석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종교계가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로 탐욕에 면죄부를 준 결과, 미국 역사학자의 저술에 따르면, 유럽인 진출 이후 400년간 아메리카 대륙 주민 1억 명이 살해되거나 사망했다. 18세기에 영국군은 천연두균에 오염된 담요들을 (면역력이 전혀 없는) 아메리카 대륙 주민들에게 ‘선물’하여 한 번에 수십만 명씩 사망하게 하는 ‘생화학전’을 여러 차례 수행했다. 이러한 참상들이 뒤늦게 알려지자 일부 지식인들은 이러한 대학살을 강력히 비판했지만, 적어도 권력자들에게는 아메리카 대륙 주민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역사를 보면 사회나 특정 분야가 이분법적 사고에 경도되는 상황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사회나 특정 분야에 위기가 닥치고, 의사결정권자가 과도한 사명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이를 극복하려 하면서, 전문가와 지식인의 상식적인 조언을 거부할 때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 사회가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수도 없이 보아 왔다.
  
현재 우리는 ‘코로나 전쟁’ 중이다. 바이러스라는 적과의 전투에서 현재 백신이 유일한 ‘실탄’임은 불문가지이다. 그런데 모더나 백신이 12일~15일 사이에 전국에서 무려 160만 회분이 폐기처리될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방역은 차치하고라도, 무려 300억 원이 넘는 혈세가 버려지는 것이다.
  
물론 ‘노쇼’ 때문에 일정 분량이 폐기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이번 모더나 백신 대량 폐기는 유효기한 경과 때문이다. 일단 해동되어 위탁의료기관에 공급된 모더나 백신은 30일 내에 사용해야 하는데, 정부가 지난 8, 9월에 1차 접종률을 올리기 위해 2차 접종 간격을 4주에서 6주로 연기했기 때문에 백신 수급이 꼬인 것이다.
  
백신 폐기가 눈앞에 닥치자 정부는 이제서야 위탁의료기관들에게 접종 간격을 다시 줄여 임박한 백신을 소진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질 때만 위탁의료기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다는 지적에는 답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오락가락하는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최일선에서 받아내느라 이미 지쳐버린 위탁의료기관들이 다시 한번 환자들의 엄청난 민원을 감당해야 하는 것을 정부는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이번 코로나 사태는 국가적 위기이므로, 정부가 수급과 접종을 최대한 관리하겠다는 사명감까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정부가 모든 것을 관리할 때 가장 효율적이라는 과도한 자신감을 의료계는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노쇼 등으로 발생하는 잔여 분량은 위탁의료기관의 판단에 따라 접종할 수 있도록 하여 조금이라도 접종률을 높이자는 의료계의 상식적인 조언을 예전부터 계속 거부한 것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춘추전국시대의 명장인 전양저는 ‘장수가 출전한 때에는 왕명도 받들지 않을 수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불복종은 곧 죽음이던 절대왕조 시절에도 이렇게 현장의 의사결정은 중시되었다. 다른 코로나 대응에서는 별로 그러지 않더니, 유독 백신 접종 관리 문제에서만 ‘결벽증’을 보여주는 정부 때문에 160만 회분의 백신이 폐기될 상황에 놓여 있다. 앞으로도 부스터샷 등 백신 접종이 계속되어야 하는데, 정부는 지금 정해진 접종 일정을 다시는 바꿀 필요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부디 정부는 위탁의료기관을 ‘관리대상’이자 ‘주사 놓는 기계’로만 보는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고, 지금이라도 의료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위탁의료기관을 협력자로 인정하고 상식적인 판단권을 허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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