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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알 수도 있는 사람
더 알 수도 있는 사람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10.06 10:1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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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준의 공릉역 2번 출구

“이제 내 생을 마감하려 합니다. 그간 난 참 행복했고 나름대로 인생을 잘 살아온 것 같아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려 합니다.”라고 시작하는 유언장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페이스북(facebook)’이 ‘알 수도 있는 사람’이라며 친구 추천을 해주었고 이름이 낯설지 않은 분이었기에 반가움에 얼른 클릭해서 들어가 보았더니 뜻밖에 첫 게시물이 그분의 영면(永眠)을 보도하는 언론기사 링크였고, 그 다음은 가족들이 공개한 그분의 유언장이었다.

지난 8월 초 65세를 일기로 김영식 전 원자력국장님이 돌아가셨다. 엘리트 공무원답게 과학기술부의 여러 요직을 역임하셨고 나중엔 과학기술인공제회의 이사장도 맡으셨지만 내게는 과거 우리 기관의 주무 부서였던 과기부 ‘원자력국’의 책임자로서 우리를 물심양면 도와주셨던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원자력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긍지가 대단하시다고 병원 선배들로부터 전해들은 적이 있었으나 개인적 친분은 없었던 차에, 뒤늦게 SNS를 통해서나마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 같아 좋아했지만, 페이스북의 예상과 달리 내게는 ‘영원히 알 수 없는 분’이 되시고야 말았다.
  
지금은 SNS라 불리는 소통수단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 종류를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들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막 보급될 무렵만 하더라도 단연 트위터(twitter)가 인기였다. 당시만 해도 나는 이른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를 지향하던 시기라 부리나케 트위터 계정을 하나 만들었다. 물론 금세 페이스북과 카카오로 관심이 옮겨가면서 나의 트위터는 그저 이름뿐인 빈껍데기로 전락해버렸지만.
  
그 뒤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내 트위터 계정에 한번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 내게도 팔로워가 한 명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와 같은 분야 전문의였으며 내가 직접 추천해서 부산에 있는 우리 분원, 동남권 원자력의학원의 진단검사의학과 과장으로 발령받은 사랑하는 후배였다. 사람 좋아 보이는 너털웃음이 특징이던 그 친구는 10여 년 전 어느 가을날 지방 학회에 참석한 뒤 기차역에서 쓰러져 원인도 정확히 모른 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그렇게 더 이상 나를 ‘follow’할 수 없는 ‘follower’가 내게는 한 사람 오래도록 존재한다.
  
우리 병원에 덩치가 크고 성격이 급했던 흉부외과 선배 한 분이 있었다. 외모와는 달리 자상한 면이 있어서 내가 샌디에이고에 있는 UCSD로 연수를 떠난다 했더니 본인도 전에 그곳에 있었다며 꼼꼼하게 미국생활 오리엔테이션을 해주었다. 심지어 후배들을 위해 챙겨놓았다는 꼬깃꼬깃한 미국 운전면허 시험문제지까지 보여주면서 이른바 ‘족보’를 알려주기도 했다. 예상치 못했던 질병으로 선배가 황망히 세상을 떠났을 때 찾아왔던 공허함과 서운함은 꽤 오래 갔다. 
  
첫 번째 기일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난 그의 카카오톡 계정을 살펴보았다. 아직 본인 사진과 함께 계정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다만 프로필 메시지가 이렇게 바뀌었을 뿐이었다. ‘1 Year in Heaven’. 아마도 선배를 잊지 못하는 사모님이 남긴 흔적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 해는 ‘2 Years’, 그 다음다음 해는 ‘3 Years’로 연수가 바뀌어 갔다. 나는 선배의 기일이 찾아오면 매번 카카오톡에 메시지를 남기곤 했다. “그곳에서 편안히 잘 계시지요? 보고 싶습니다.” 물론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내가 하던 일을 다른 사람이 하는 것, 다른 사람이 내 책상을 여는 것, 아침에 출근한 집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것, 오늘 퇴근한 회사로 내일 아침 다시 출근하지 못하는 것.’ 100주년 기념교회를 담임했던 이재철 목사님은 죽음을 그렇게도 정의하셨다. 그러니 내가 저질러 놓은 일 때문에 남은 자가 고생하지 않도록 일을 깨끗하게 매듭지으며 살고, 남은 자가 내 서랍을 들여다 볼 때 부끄럽지 않도록 모든 것을 정리하며 살고, 출근할 때마다 귀가하지 못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살고, 퇴근할 때마다 다시 못 볼 것처럼 따뜻한 말로 동료의 수고에 감사하며 사무실을 나서자고 권면하신다. 
  
SNS가 일상이 된 오늘날 죽음은 이렇게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알 수도 있는 사람’을 영원히 알 기회가 없어지는 것. 나의 팔로워가 아무런 액션을 보여주지 않는 것. 하트 가득한 이모티콘을 아무리 보내도 무응답인 것.
  
지난여름 우리 기관의 역사와도 같았던 선배 한 분이 돌아가셨다. 방사선종양학과 전문의로 수많은 자궁경부암 환자들을 치료하셨고 원자력병원장과 한국원자력의학원장을 역임하셨던 조철구 선생님. 같은 과 후배 한 분이 원내 게시판에 추모의 글을 올렸다. 그 중 한 문장이 눈에 띈다. ‘조 원장님은 방사선치료 인프라가 약한 아시아 국가에 방사선치료 기술을 전수하시는 일에 열정이 많으셨고 그래서 아시아 각국의 언어를 열심히 독학하시고 그들과 대화하는 것을 취미처럼 좋아하셨기에 그들의 존경을 받으셨습니다.’ 갑작스런 부고에 슬픔을 표하는 외국 지인들이 많은 게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조 원장님과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며, 그 밑에서 보직을 맡아 집행부 활동 또한 함께 오래 했음에도 그분의 그런 열정과 노력은 잘 알지 못했었다. 온화한 성격에 늘 긍정적이셨던 그 분을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이제 없음이 아쉽고 슬프다. ‘알 수도 있는 사람’을 알 기회뿐 아니라,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동료와 친구들을 ‘좀 더 잘 알아갈 수 있는’ 시간도 분명히 제한이 있고 그 데드라인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그러기에 이재철 목사님의 권면처럼, 우리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진면목을 오늘 하루 조금 더 알아가고, 그래서 조금 더 이해하고 배려하게 될 수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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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2021-10-07 21:26:40
잘 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