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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징가제트 vs. 로보트 태권브이
마징가제트 vs. 로보트 태권브이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09.2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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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준 원자력병원장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로숨(Rossum)’이라는 이름의 과학자가 있었다. 체코말로 ‘이성(理性)’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이라고 한다. 생명체 복제 연구를 하던 중에 화학적으로 특별한 물질을 발견한 로숨은 이것을 이용하여 인조 개, 인조 송아지 따위를 만들다가 마침내 ‘인간’을 만드는 데까지 도전한다. 무려 10년에 걸친 노력 끝에 장기들을 모두 갖춘 남자 하나를 간신히 만들지만 그 얼마 뒤 ‘늙은 로숨’은 실험실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엔지니어였던 그의 아들, 그러니까 ‘젊은 로숨’은 아버지가 남긴 설계도를 참조해서 인조인간의 내부를 극도로 단순화시킨 다음, 대량생산이 가능한 시스템을 완성한다. 나름 인간과 여러 모로 비슷했던 아버지의 작품이 아들의 손에 의해 오로지 노동에만 최적화된 새로운 상품으로 거듭난 것이다.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가 1920년에 쓴 희곡 <R.U.R.: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Rossum’s Universal Robots)>의 서막에 나오는 이야기다. 무려 100년 전에 발표된 이 작품을 최근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첨단 테크놀로지 시대의 고민과 악몽을 한 세기 전에 예측하고 구구절절 실감나게 묘사한 작가의 상상력이 놀라웠다. 이 희곡이 더욱 의미 있는 이유는 여기에서 최초로 ‘로봇(Robot)’이란 말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작가가 제목만은 영어로 붙였지만 내용은 체코어로 쓴 원작의 본문에서 ‘robota’로 표현되는 ‘로봇’의 본래 뜻은 ‘노동’ 혹은 ‘노역(勞役)’이라고 한다. ‘유니버설 로봇’은 개별화된 맞춤형이 아니라 똑같은 설계 아래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범용 로봇을 의미한다.
  
이처럼 로봇의 첫 등장은 단순히 재미를 위한 SF 문학의 범주를 넘어 로봇이 고통과 분노, 인내를 습득하며 인간을 닮아가다가 마침내 ‘희생’을 배우는 데까지 이른다는 심오한 철학적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었지만, 어린 시절 ‘우주소년 아톰’이나 ‘철인 28호’와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로봇을 처음 접한 과거 이 땅의 소년들에게 로봇은 그저 신나는 최고의 장난감이요, 마르지 않는 또래 간 대화의 소재요, 생각만으로 가슴이 벅찬 슈퍼 히어로들이었다. 참고로 나는 마징가제트의 ‘광팬’이었고 지금도 병원 내 방의 탁자 위에는 늠름한 마징가제트 사진이 들어가 있는 예쁜 액자가 놓여있다.
  
몇 년 전 모교 동창회 신문사에서 에세이 원고 요청을 받고 나는 마징가제트를 소재로 글을 쓴 적이 있다. 마징가제트의 몸을 구성하는 주성분은 특수 동위원소를 정제해서 나오는 초합금제트이며 여기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소위 ‘광자력’이다. 환경오염이나 인체에 미치는 악영향이 전혀 없는 청정에너지 ‘광자력’처럼 우리 병원도 내내 순수하고 우직하게, 국가로부터 주어진 사명을 수행하자는 게 요지였다. 정부가 ‘원자력’을 계속 마음에 안 들어 하면 ‘광자력’ 병원으로 이름도 바꾸면 어떻겠느냐 짐짓 제안하면서 말이다. 물론 요란한 ‘탈원자력’ 바람이 시나브로 병원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에둘러 소극적 항의의 뜻을 담은 글이기도 했지만.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마징가제트가 거론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로보트 태권브이’다. ‘Robot’의 정확한 국문표기는 ‘로봇’으로 되어 있지만 로보트 태권브이 때문에 아직도 ‘로보트’란 표기가 널리 쓰인다. 어쨌든 이 둘에 대한 토론은 언제나 해묵은 질문으로 이어지고야 만다.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말이다. 하나는 일제고 하나는 국산이라는 점이 냉정하고 객관적인 비교를 어렵게 할 때가 많지만 나는 마징가제트가 국산이라고 믿었던 어린 시절부터 항상 마징가가 태권브이보다 세다고 믿는 쪽이었다.
  
태권브이의 승리를 말하는 쪽 주장 중에는 마징가가 1972년 제작이고 태권브이는 그보다 4년 늦게 나왔으니 아무래도 신제품이 기술적으로 업그레이드 됐기에 더 강할 것이라고 말하는 게 가장 단순한 논리였다. 일단 제원을 살펴볼 때 키가 56미터에 이르는 태권브이가 18미터에 불과한 마징가쯤은 가볍게 눌러버릴 수 있다고 나름의 수치적 근거를 제시하는 자들도 있었다. 언젠가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는 한 강연에서 두 로봇을 비교하며 쇠돌이가 조종석에서 레버를 움직이거나 버튼을 눌러 조종하는 마징가보다 훈이의 동작을 인식하여 즉각적으로 움직이는 태권브이가 훨씬 커뮤니케이션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둘이 싸우면 태권브이가 이긴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태권브이 예찬론자들은 체구는 비록 그보다 작지만 마징가의 무기가 얼마나 다채로운지 모르고 있다. 그저 태권도 폼 잡는다고 겅중겅중 뛰기만 하는 태권브이와 달리 마징가에겐 광자력 빔, 로켓 펀치, 턱밑 허리케인, 볼에서 나오는 냉동 광선 등등 수많은 무기들이 있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각종 무기들을 종합선물세트로 안긴다면 태권브이를 무난히 잡을 수 있으리라는 게 내 생각이다. 아울러 마징가의 주적(主敵)이라 할 ‘헬 박사’와 미케네 괴수군단의 전력은 태권브이가 상대하는 악당 카프 박사와 급이 다르다. 강적들과 끊임없이 전투를 벌여 온 마징가의 실전감각을 절대로 얕봐선 안 된다.   
  
로봇의 탄생부터 시작해서 영원한 라이벌 마징가와 태권브이의 전력비교까지 뜬금없이 둘러본 까닭은 우리 병원의 숙원이던 의료용 로봇장비가 마침내 들어온다는 흥분 때문이다. 수년 전 수술장을 리노베이션 할 때에 로봇 수술방이라고 하나를 큼직하게 만들어 놓았건만 방사선을 이용한 진료가 주력인 우리 기관의 특성상, 로봇 도입은 항상 최신 방사선 치료기나 동위원소를 이용한 첨단 영상장비 등등에 밀렸었다. 그러다 드디어 올해 우리 병원이 로봇산업진흥원이 주관하는 국가 연구과제에 선정이 되어 국산 로봇 장비를 들여오게 된 것이다. 이제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로봇 수술기 ‘다빈치’와 선의의 경쟁을 벌일 채비를 차리고 있다. 연구개발이 강점인 과기부 산하 병원답게, 노련한 우리 외과 의사들과 연구자들이 앞으로 거인을 물리칠 다양한 무기들을 속속 만들어 내리라 믿는다. 마징가제트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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