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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
  • 전성훈 변호사
  • 승인 2021.09.2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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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36)
전 성 훈
변 호 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이수현’이라는 사람이 있다. 흔히들 ‘악동뮤지션’ 소속 가수를 떠올릴 것이다. 올드 영화팬이라면 홍콩 남자배우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생면부지의 외국인을 구하기 위해 열차 앞에 뛰어든 26세의 학생을 떠올릴 것이다.
  
2001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유학 중이던 고 이수현 씨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 중이었다. 지하철역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그는 한 취객이 열차 선로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열차가 이미 접근 중인 것을 보고서도 취객을 구하기 위해 선로로 뛰어내렸다. 열차 운전 기관사와 역장의 증언에 따르면 그에게는 피할 수 있는 7초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구조를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가 휴학 중이던 대학교에서는 그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고, 우리 정부는 그를 의사자로 인정하고 훈장을 수여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희생에 대한 예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놀라운 것은 일본 내에서의 반응이었다. 타인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일본에서, 한국인, 그것도 잠시 머물다 가는 유학생이 생면부지의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 열차 앞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은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애도의 물결이 크게 일었고, 그의 장례식에 일본 총리와 관방장관(우리의 국무총리에 해당)이 직접 조문했으며, 일본 정부는 그에게 ‘목배(훈장과 유사)’를 수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해 우호적인 인상을 갖게 되었으며, 이후 이어진 ‘한류’ 유행의 기반이 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2007년 제작된 추모영화 ‘너를 잊을 수 없어’ 시사회에는 일왕 부부와 일본 총리 부인이 참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고 이후 일본 전역에서 답지한 조의금과 성금 등을 모아, 그의 부모는 그가 재학했던 일본어학교에 ‘LSH아시아장학회’를 설립하여 현재까지 아시아 각국의 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 장학회에는 8,500여명에 달하는 후원자가 있고, 현재까지 1,000명이 넘는 학생이 장학금을 지원받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일본 정부는 2015년 그의 부친에게 ‘장학회 설립 등을 통해 한일 양국의 우호, 친선과 상호이해의 촉진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수여했고, 2019년 그의 부친이 사망하자 일본 외무장관은 조의를 표하고 ‘고 이수현 씨의 뜻을 이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올해에도 사건 20주기 기념식이 치러졌다.
  
희생은 안타까운 것이지만 때로는 한 톨의 밀알처럼 사회를 바꾸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는 열차 앞에 뛰어드는 순간 ‘이 사람은 일본인인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국적보다 생명을 소중히 여겼고, 그의 이러한 보편적 인류애는 개인주의적인 일본인들의 마음을 쳤다. 그의 희생은 사회적으로 올바른 평가를 받았고, 그의 유족들은 정당한 예우를 받았다.
  
며칠 전 진주시에서 개원 중인 고 이영곤 원장님이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운전자를 돕다가 2차사고로 숨지는 사고가 있었다. 향년 62세, 어찌 안타깝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 폭우 속 빗길에 미끄러져 고속도로 가드레일에 충돌하고 멈춰서 있는 사고 자동차를 보았을 때, 그는 여느 사람들처럼 빗길 고속도로의 위험을 생각해서, 아니면 단지 비가 맞기 싫어서 사고 현장을 지나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운전자가 다쳤을지 모른다’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렇게 ‘환자가 저기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 조건반사처럼 차를 세우고 비를 맞으며 사고 자동차로 뛰어갔을 것이다. 그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 운전자가 의식이 있고 경상만 입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마치 자신이 치료해서 완쾌된 환자를 본 것처럼 안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이런 증상이 있으면 꼭 병원을 찾아가라고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했을 것이다. 그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그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 진주의료원 근무 시절 알게 된 교도소의 심각한 의사 부족 현상을 보고, 국가는 재소자로 보지만 그의 눈에는 환자로 보이는 사람들을 모르는 척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20여 년 간 매주 3번씩 진주교도소를 찾아 재소자들을 진료해 왔다. 그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그는 추석 전날에 가족들과 함께 이미 성묘를 다녀왔지만 ‘아무래도 산소에 나무를 좀 더 심어야 겠다’고 하면서 나무 심을 자리를 보려고 혼자서 다시 산소를 찾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효자였다. 그는 20년 가까이 같은 장소에서 개원하면서 병원을 찾는 동네 할머니들을 아들처럼 잘 대했고, ‘비싼 수액 맞지 말고 그 돈으로 집에 가서 고기 사 드시라’고 말하던 미련한 의사였다. 그는 비싼 약값에 우물쭈물하던 환자를 위해 약국에 대신 약값을 내 주던 이해할 수 없는 의사였다. 동시에 그는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내놓았던 가슴 따뜻한 어른이기도 했다.
  
의료계는 고귀한 희생에 상응하는 예우를 위해 고 이영곤 원장님을 위한 의사자 인정 신청을 추진했다. 진주시의사회, 경상남도의사회, 의사협회의 노력에 힘입어, 사고 발생 4일만에 진주시장은 직권으로 보건복지부에 의사자 인정결정을 청구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그가 30년 가까이 의사로서 아낌없이 봉사해 왔음을 지역사회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2018년의 마지막 날에 일어난 안타까운 고 임세원 교수님 사건을 기억한다. 동시에 임 교수님의 의사자 인정 과정에서, 일부의 편견으로 인해 소모적 논쟁과 법적 절차를 거쳐야 했음도 기억하고 있다.
  
고 이영곤 원장님은 행동으로 ‘의사는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웅변했다. 그는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했지만, 그가 30년 동안 가졌던 ‘의사의 사명감’을 우리 사회가 올바르게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우리에게 남았다. 이번에는 임 교수님 사건 때와 같은 불필요한 논쟁과 절차를 거침이 없이, 그의 희생이 사회적으로 올바른 평가를 받고 그의 유족들이 정당한 예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의 영면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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