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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사회 제35대 상임진 칼럼] 어느 오후의 단상
[서울시의사회 제35대 상임진 칼럼] 어느 오후의 단상
  • 의사신문
  • 승인 2021.09.1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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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석 부회장(강남 옴므앤팜므성형외과의원)
            황규석 부회장

유난히 뜨거웠던 2021년 지난 여름. 오랜만에 맞이한 한가로운 오후에 친한 후배를 만나기 위해 학창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찾은 동네의 모습에서 고향을 찾은 듯한 정감과 추억이 반가운 마음으로 다가왔다.

가벼운 기름값의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우고 고향을 방문하는 맘으로 내친김에 세차까지 하게 됐다. 익숙하고 정감 있는 동네 풍경에 취해서 였을까? 세차 후 제 모친 연배의 허리가 굽으신 어르신이 차량의 물기를 닦아 주시는 데 운전석이 가시방석 같았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 차에서 내려 어르신과 함께 차를 닦았다 금세 땀이 온몸을 적시었지만 그래도 제 마음은 훨씬 더 시원해 졌다. 

제가 누구에게 보여주거나 기대를 하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어도 고맙다는 눈인사 정도는 받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멀리서 멀뚱히 보더니 귀찮다는 듯 제가 닦은 수건을 저기에 두라고 손짓만 휘휘 하고는 가버렸다. 사람의 성의를 이렇게 무시를 할 수 있나 화가 나서 따져 묻고도 싶었다. 호의를 반겨주지 않으신 어르신에 대한 마음이 각박해진 대한민국 현실을 보는 것 같아서 하루 종일 불편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모든 일정을 마친 늦은 시각 집에 돌아오는 길에 기억하기는 싫었지만 다 시 한번 그 일을 깊게 되짚어 보았다. 그러자 보이지 않았던 것이 신기하게도 보이기 시작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된 마냥 들떠서, 마스크도 쓰지 않고 차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간 저의 모습과, 뜨거운 땡볕 아래에서 하루 종일 뜨거운 차량의 배기 바람을 맞으면서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힘든 숨을 참으셨을 어르신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나를 피한다고 호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마스크도 쓰지 않고서 당당히 다가간 저의 무모함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그제야 하루 종일 씩씩거린 나의 못난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하루의 끝자락 이었다. 

얼마 전에 저는 우연히 세조가 ‘의약론(醫藥論)’에서 의사를 8가지로 나누어 기록해 놓은 것을 알게 되었다. 

첫번째는 심의(心醫), 환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서 병을 낫게 하는 의사다. 둘째는 식의(食醫)로 음식을 조절해 병을 낫게 하는 의사이고, 셋째는 약의(藥醫)라 해서 약만 쓰기를 좋아하는 의사를 말한다. 넷째는 위급한 상황에 자기가 먼저 당황하는 혼의(昏醫), 다섯째는 환자의 상태를 제대로 살피지 않고 함부로 약이나 침을 쓰는 광의(狂醫), 여섯째는 맞지 않는 약을 쓰고 쓸데없는 것에 참견하는 망의(妄醫), 일곱째는 의술을 잘 알지 못하는 사의(詐醫)다. 마지막으로 살의(殺醫)는 총명하나 환자를 측은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 의사를 가리킨다.

환자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뛰어난 의술이 도리어 생명을 죽게 할 수도 있다는 일침 일 것이다. 나 또한 22년간 성형외과, 그 중에서도 코성형을 전문으로 수술해 왔다. 그 어떤 수술도 두렵지 않던 초기의 만용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코 보다는 그 사람이 보이고 환자분의 간절한 마음이 보여서 진료를 하면 할수록 더 조심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환자분들의 손을 잡아드리게 되는 것 같다. 

부족한 나도 이런 마음인데, 열악한 의료제도 하에서도 묵묵히 진료 현장을 지키고, 환자분들의 아픔을 함께 해온 13만의 ‘심의(心醫)’들 덕분에 세계 최고의 대한민국의 건보제도를 유지 할 수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대한민국은 강제로 수술실에 CCTV를 설치하는 법이 통과되고, 형사처벌 만으로 면허가 취소될 수 있는 법, 간호사 단독법과 같은 악법 들이 만들어 지고 있다.

의학 위에 군림하는 세계 유일의 심평의학 덕분에 인술(仁術)은 커녕 전문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의술(醫術)조차 펼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안타까운 현실과, 국민들에게 우리 의사들을 악의(惡醫)로 오해하게 만드는 수많은 법령과 제도들 앞에서 세조의 팔의론(八醫論)은 현대를 사는 지금의 우리 의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비록 암울한 현실이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전문가로서의 자부심과 실력을 갖춘 의사로서, 그리고 나를 찾아 주신 환자분 한분 한분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따듯한 가슴을 가진 심의(心醫)로서 환자분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면 실타래처럼 얽힌 불신과 갈등이 눈 녹듯 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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