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병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병원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09.07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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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29)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대중가요 중에도 명곡들이 꽤 있다. 이소라가 읊조리듯 부르는 <바람이 분다> 역시 충분히 명곡으로 꼽을만한 노래 아닐까싶다. 애절한 멜로디 못지않게 시어(詩語) 같은 가사가 한 소절 한 소절 마음을 파고든다. 얼핏 들어서는 그저 실연당한 사람의 심경을 노래하는 것 같지만 여러 차례 듣고 또 읽다보면 실연의 아픔을 넘어서는 철학과 단단한 인생관이 느껴지기에 사람들은 이 노래를 통해 ‘힐링’을 경험한다. 

서러운 마음에 텅 빈 풍경처럼 슬프게 불어오는 바람. 시린 한기 속에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하는 바람. 그리고 세상은 어제와 같아 보이나 시간은 흘렀고 나는 이제 달라져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바람. <바람이 분다>의 가사 속에 등장하는 세 번의 바람은 노래하는 이를 점점 성장으로 이끌어 간다. 어쩌면 인생의 온갖 바람들이 그렇게 사람을 성장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소라의 노래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철학자들의 명언을 해설한 책 하나를 읽다가 밑줄 긋게 된 루키우스 세네카의 문장 탓이다. “어느 항구로 향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어떤 바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을 설명하는 저자는 정치가이면서 스토아 철학자였던 세네카의 이력을 소개하며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었고 그러하기에 예측할 수 없는 감정과 욕망이라는 바람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웬만하면 자꾸 바람을 맞지 말라고 해설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내겐 그보다 오히려 ‘항구’의 중요성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이래저래 바람을 많이 맞지만 그게 인생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자신의 목적지를 몰랐기 때문이라는 말 아닌가.

기업들은 자신들이 향해가는 항구를 잃지 않기 위해 이른바 ‘비전’과 ‘미션’, ‘핵심가치’ 따위를 만들어서 전 직원들이 공유하도록 한다. 기업들의 경영방식을 앞 다투어 도입하는 의료계 역시 한때 큰 예산을 들여 이런 트렌드를 너도나도 따라했었다. 우리 기관의 예를 들자면 2004년에 새롭게 취임하신 원장님 주도로 2013년에 이르러서는 국민들로부터 가장 먼저 선택받는 기관이 되자는 취지로 ‘To be the first choice’를 슬로건으로 외치며 비전과 미션 등등을 엄숙하게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다 2013년이 채 도래하기도 전인 2010년에 기관장이 바뀐 걸 계기로 또다시 ‘비전 2020’ 선포식이 있었고 10년 뒤 2020년에는 ‘세계 방사선의학의 중심’이 되자는 결의를 다졌었다. 그걸 기억하는 직원들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정작 2020년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정신없이, 그리고 허무하게 흘러가 버렸다.

떠들썩하게 선포식 행사를 진행하고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지만 기관장이 바뀔 때마다 덩달아 바뀌는 비전이나 미션은 아무리 장엄한 문장이라 할지라도 직원들의 마음에까지 도달하기엔 역부족일 때가 많다. 의료기관 인증심사 때 가끔 조사위원들이 이에 대해 질문을 하니까 그때만 벼락치기로 잠시 외는 비전, 미션이라면 우리가 함께 향해 가는 ‘항구’로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직원들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 같은 비전과 미션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도, 형식적인 핵심가치를 외는 것도 그저 귀찮고 지겨운 숙제 같은 일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어쨌든 이런 종류의 비전, 미션, 핵심가치, 실행전략 등등을 포함하여, 회사의 방향성에 대한 논의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미사여구를 뽑아내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버렸지만 적어도 종합병원 이상의 의료기관이라면 언제나 놓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키워드가 있다. ‘진료’, ‘연구’, ‘교육’이 그것으로서, 이는 곧 그 의료기관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기관과 한때 협력관계에 있었던 미국의 메모리얼 슬로언케터링 암센터의 로고는 위를 향한 화살표에 작대기 세 개가 가로 질러져 있는 형태다. 그쪽 의사들은 누구나 작대기 세 개의 명칭이 차례로 ‘research’, ‘treatment’, ‘teaching’임을 잘 알고 있었다. 화살표가 향하는 방향은 ‘암 정복(toward the Conquest of Cancer)’이라는 설명도 보태곤 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병원’이라 칭송받는 메이요 클리닉의 로고는 방패 세 개가 겹쳐 있는 형태다. 좌측 방패는 ‘의학 연구’를, 우측 방패는 ‘의학 교육’을 상징하며 가운데 가장 큰 방패가 ‘환자 진료’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 3개의 방패를 들고서 그들의 핵심가치인 ‘환자의 필요를 최우선으로(The needs of the patient come first)’로 향해 가는 길이 바로 자신들의 항구를 향해 가는 길임을 메이요 클리닉의 직원들은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기관은 현재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속이다. 과거에 원자력병원을 출범시킨 정부 기관이 과학기술처였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처는 이후 과학기술부, 교육과학기술부, 미래창조과학부 등등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명칭과 기능이 변경되는 우여곡절을 겪다가, 마침내 현재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되었고 우리는 여전히 그 산하 기관으로 존재하고 있다. 원자력병원을 포함하는 ‘한국원자력의학원’이란 이름으로 회사 규모가 커졌지만 정권의 변화로 정부 부처에 큰 바람이 불 때마다 우리 기관에까지 밀어닥치는 풍랑의 크기 또한 커졌다. 주기적으로 불어오는 ‘국정과제’라는 거센 바람, ‘공공기관 혁신’ 혹은 ‘부처 통폐합’이라는 섬뜩한 바람.

요즘 우리가 바라보는 항구에는 ‘과학기술특성화 병원’이라는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과학기술부가 왜 병원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라는 해묵은 질문에 대한 원론적 답변이기도 하다. 하지만 슬론케터링과 메이요가 그러하듯이 ‘진료’, ‘연구’, ‘교육’이라는 의료기관의 본질적 사명은 달라질 수가 없다. 정부의 요구와 기대에 따라 항로는 다소 변경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향해 가는 항구가 달라져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래야 순풍을 최대한 이용하고 역풍을 피해가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으리라. ‘내게는 소중했던 잠 못 이루던 날들’이 우리 기관을 산하에 두고 있는 정부에도 똑같이 소중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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