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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미 벤담의 찬사와 한숨
제러미 벤담의 찬사와 한숨
  • 전성훈 변호사
  • 승인 2021.09.07 0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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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34)
전 성 훈 변 호 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고등학교 시절, 학업에 1이라도 관심이 있었던 학생이라면 이 문구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모범생들이었을 의사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이 문구는 영국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주장한 공리(功利)주의를 한 줄로 요약하는 말이다. 최대 다수가 최대 행복을 느끼게 하는 행동이 바로 선하고 정의로운 행동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다수의 행복’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효율(utility)’은 공리주의 최고의 가치이다.

의외이겠지만, 옥스퍼드 대학교를 15세에 졸업한 천재 철학자 벤담이 일생을 바친 것은 공리주의의 전파가 아니었다. 그의 필생의 사업은 ‘감옥 짓기’였다. 더 구체적으로는 ‘가장 공리주의적인(=효율적인) 감옥 짓기’였다.

범죄자의 수감과 관리는 전통적으로 정부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18세기 유럽 각국에서는 산업혁명으로 도시 지역에 인구가 집중되어 범죄가 폭증했다. 각국 정부들은 폭증한 범죄자의 수감과 관리에 비명을 질렀고, 수감자들은 콩나물시루보다 열악한 감옥 환경에 비명을 질렀다. 영국은 호주, 뉴질랜드 같은 해외식민지로 추방하기도 했지만, 이것도 비용이 상당했다. 궁리 끝에 각국 정부들은 이를 민간에 위탁운영하는 민영교도소 제도를 도입했다.

철학자이자 ‘변호사’였던 벤담은 범죄의 필연적 증가와 민영교도소의 사업성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연구 끝에 특별한 형태의 감옥을 창안해 냈다. 이 감옥은 작은 원통을 큰 원통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그리고 소수의 간수가 있는 작은 원통(감시탑) 내부는 어둡게, 다수의 죄수가 있는 큰 원통(감방) 내부는 밝게 설계된다. 밝은 곳에 있는 죄수는 어두운 곳에 있는 간수가 나를 보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이렇게 감시의 효율을 극대화하여 감시자를 적게 둘 수 있으므로 비용이 절감될 수 있다. 벤담은 이 감옥이 “진행되는 모든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여기에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를 뜻하는 ‘opticon'을 합성하여 ‘판옵티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벤담은 가장 효율적인 감옥을 설계해 냈다고 자부했다. 득의양양한 그는 이 감옥 신축 사업을 각국 정부에 제안했다. 처음에는 프랑스 정부에 제안하여 승낙을 얻었지만, 루이 16세가 프랑스 혁명에서 목이 잘리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 그는 굴하지 않고 모국인 영국 정부에 다시 제안하여 승낙을 얻었다. 런던 근교에 감옥 신축 부지를 매입하기 위해 자신의 전재산을 쏟아 부었지만, 예상과 달리 런던시 의회는 토지매입보상금을 쥐꼬리만큼 주었다. 결국 벤담은 파산했고, 그의 판옵티콘은 그렇게 묻혀버리는 듯했다.

10여년 후 영국의 감옥은 포화를 넘어서 폭발 직전에 이르렀고, 다시 감옥 개혁안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과거 벤담이 제안한 판옵티콘이 다시 논의되었지만, 정부는 빠듯한 예산 때문에 신축 감옥들을 판옵티콘 형식이 아닌, 보다 많은 수감자를 수용할 수 있는 펜실베니아 형식(바퀴살 모양)으로 지었다. 결국 벤담은 그토록 실현하고자 했던 ‘가장 공리주의적인 감옥’을 끝내 보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벤담 사망 150년 후에 판옵티콘은 화려하게 부활한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현대 ‘규율 사회’의 구조를 판옵티콘에 비유하여 설명했기 때문이다. 벤담은 죄수들을 통제하기 위한 감옥 건축을 고안해 낸 것뿐이지만, 그 후학인 푸코는 이러한 구조가 실은 사회 전체를 통제하는데 활용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벤담은 청출어람의 탁월한 시각을 제시한 이 후배 철학자에게 지하에서 찬사를 보내고 있을 것 같다.

지난 30일 ‘수술실 CCTV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의료계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발의된 지 6년만에 드디어 국회 문턱을 넘은 것이다. 물론 입법 과정에서 의료계가 지적한 문제점들을 대폭 수용하여 ① 모든 수술이 아닌 ‘전신마취 등 환자의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의 수술’만을 대상으로 하고, ② 영상정보처리기기가 아닌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을 설치하며, ③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비용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고, ④ 일정한 예외사유에 해당하는 경우 의료인이 촬영을 거부할 수 있으며, ⑤ 의료인 비동의 시 녹음할 수 없고, ⑥ 수사, 재판, 의료분쟁조정중재 등의 경우에만 열람할 수 있으며, ⑦ 시행까지 2년의 유예기간을 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수술실 CCTV법의 국회 통과 이후 한 의료인은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극히 일부의 일탈 때문에 전체 의료인을 불신하여 입법까지 해야 하는가? 수술은 의료인이 가장 예민하고 긴장된 상태에서 하는 의료행위다. 이것을 카메라 밑에서 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이 과연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우리나라 의료인들의 도덕성은 불신하지만 ‘배짱’만큼은 신뢰하나 보다. 아니면 자신들이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익숙하니 카메라 밑에서 수술하는 것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논란 많은 내용을 세계 최초로 입법하기는 어려웠을 테니 말이다. 덕분에 이제 우리나라 의료인들은 CCTV라는 판옵티콘의 눈 아래에서 수술을 하게 되었다.

푸코의 지적과 같이, 피감시자를 감시하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감시자는 피감시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항상 감시받고 있다는 의식을 갖게 하여 감시를 받아들이게 하고 이를 내재화시킨다. 판옵티콘의 밝은 감방 안의 죄수가 내부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중앙 감시탑을 향해 머리 숙여 기도하는 19세기의 그림은, ‘보이지 않는 감시자’의 지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CCTV라는 판옵티콘을 통해 의료인들을 감시하게 될 보이지 않는 감시자는 누구일까? 그것은 의료사고를 주장하는 환자가 아니다. 그것은 ‘방어진료’이다.

의료의 효율을 무시하고 감시의 효율을 극대화한 이 현대판 판옵티콘은, 심지어 수백억 원에서 수천억 원에 이르는 불필요한 비용을 발생시킬 것이다. 효율을 위해 판옵티콘을 창안해 낸 벤담은, 공리주의에 반하는 이 극심한 비효율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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