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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보기가 역겨워
나 보기가 역겨워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08.24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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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27)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골프를 처음 배운 건 진해에서 해군 군의관으로 근무할 때였다. 내 경우는 그저 시간 날 때마다 동료 군의관들과 모여 앉아 각종 레슨 이론에 관해 토론하고, 일과 후에는 군에서 운영하는 골프 레인지에 나가 무작정 연습공을 때려댔던 게 입문 과정의 전부였다. 제대로 된 코치가 없었으니 실력이 늘 리가 없었다. 해군 골프장에서 엉겁결에 소위 ‘머리를 올리자마자’ 난 골프에 흥미를 잃었고 원래 즐기던 테니스로 돌아왔다. 보통 테니스를 열심히 치다가 골프로 취미를 갑자기 바꾸는 사람들을 일컬어 ‘환골탈태’했다고 한다. ‘테니스를 탈출해서 골프로 돌아왔다’란 뜻의 우스개 섞인 사자성어다. 따라서 내 경우는 그와 반대로 ‘환태탈골’이라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후 시간이 많이 지나 원자력병원에 근무하면서 가게 된 1년간의 미국 연수가 골프채를 다시 잡는 계기가 되었다. 샌디에이고의 태평양 연안에 늘어선 아름다운 골프장들이 뿜어대는 ‘환골탈태’의 유혹을 차마 물리치기 힘들었다고 해야 할까. 특히 멸종 위기의 소나무들이 늘어선 ‘토리 파인스(Torrey Pines)’ 골프장은 PGA 대회가 열리는 유명 코스로서 샌디에이고 거주자들에겐 엄청난 그린피 할인을 해주기 때문에 자주 찾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실력은 여전히 발전이 없었기에 골프장 갈 때마다 매번 상당한 숫자의 공을 잃어버리곤 했다.
 
아빠의 엉성한 골프 솜씨는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이들에게 뜻밖의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금방 잃어버릴 걸 대비해서 싸구려 골프공을 잔뜩 사 들고 집에 오는 날이면 아이들이 거기에 네임펜으로 줄을 긋고 쓱쓱 그림을 그려 댔다. 나는 다 같이 큰 별을 그려보자고 제안을 했고 우리 식구들은 저녁마다 둘러앉아 색색의 별 모양을 골프공에 그려 넣는 특별한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나중에 필드에서 골프를 칠 때 동반자들은 내 공에 그려진 커다란 별이 마치 북한군 최고위급인 차수 계급장에 등장하는 왕별 같다면서 ‘차수별’이라고 불렀다. 귀국 후 한동안 샌디에이고 친구들이 토리 파인스 골프장에서 ‘차수별’이 그려진 공이 종종 발견된다면서 그때마다 내 생각이 난다고 연락을 주기도 했다.
 
구력이 쌓이다 보면 운도 자연스럽게 따르는 것일까. 이후 난 충주의 한 골프장에서 홀인원을 기록한 적이 있다. 홀인원 기념 트로피에 빨간색 왕별이 그려진 골프공이 살포시 올라가 있음은 물론이다. 진단검사의학과 의사의 관점에서 보면 CV(변이계수)가 너무 커서 도무지 ‘정도관리’가 되지 않는 골프 실력이었지만 어느 날 놀랍게도 81타, 그러니까 ‘9개 오버’를 친 적이 있다. 동반자들은 축하한다면서 소위 ‘싱글패’를 만들어 주었다. 어찌어찌 홀인원도 해 보고, 싱글 디지트 스코어도 기록해 보고 나니 자연스럽게 ‘아, 나도 웬만큼 골프를 치나 보다’하는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아마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 앞부분을 열심히 읊고 다녔던 게 이 무렵이었던 것 같다. ‘나 보기가 역겨워’에서 말하는 ‘보기’는 골프에서의 ‘보기(bogey)’를 의미한다. ‘파(par)나 버디를 해야 하는데 보기가 웬 말이냐’라는 자만심의 표현이었다.
 
골프는 이래저래 마음 편히 즐기기에는 제약이 많은 스포츠라 이후엔 주로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탁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환탁탈골’의 시기라고 해야 하나.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스크린 골프의 대유행으로 골프의 진입장벽이 낮아지는가 싶더니 코로나 시대를 맞아 역설적으로 골프 인구가 크게 늘고 TV 예능 프로그램에까지 골프가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중앙일보의 성호준 골프 전문기자는 ‘그동안 영화에서 드라이버는 잔인한 조직 폭력배의 무기였고 골프장은 주로 로비를 하거나 허세 떠는 장소로 이용되었지만 요즘 골프 예능이 늘어난 걸 보면 이런 오해가 많이 풀린 것 같아 다행’이라는 취지의 칼럼을 쓰기도 했다. 이쯤 되니 나 역시 골프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져보고 싶은 마음이 다시 생겼다.
 
마침 우리 병원에 얼마 전 응급실 전담의사로 입사한 한 선생님의 SNS 프로필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골프에 진심인 편”. 내겐 좀 어색했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은 걸핏하면 ‘무엇무엇에 진심인 편’이란 표현을 즐겨 쓴다고 한다. 일본식 말투라는 비판도 있지만 워낙 폭발적으로 유통되는 유행어라 심지어 올해 초 질병관리청이 제작한 거리두기 홍보용 포스터에도 해시태그와 함께 ‘우린 방역에 진심인 편’이란 문구가 등장한다. 어쨌든 나는 ‘골프에 진심이 편’이라는 사람들의 행태는 어떤 것인지 자못 궁금해졌다.
 
의과대학 본과생이 된 아들이 한 달도 채 안 되는 여름방학 기간 중 골프를 배워보고 싶다고 했을 때 평소 온 가족이 함께 골프를 즐기는 것을 행복한 미래의 모습으로 꿈꿔왔던 나는 아들의 제안을 크게 환영하고서 즉시 동네 실내연습장들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한 달짜리 레슨은 불가하고 최소 기간이 3개월이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아들이 한 달, 그리고 나머지 두 달은 내가 레슨을 받기로 했다. 한 달은 금방 지나갔고 내가 갈 수 있는 시간이라고는 주말뿐이라 코치로부터 레슨을 받을 기회가 없었지만 그래도 돈이 아까워서 혼자라도 연습할 겸 지난 토요일 저녁 처음으로 연습장을 찾았다. 그날 난 ‘골프에 진심인 편’이 어떤 것이라야 하는지 한 가지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카메라가 설치되어 내 스윙 모습이 화면에 나오는 연습장은 처음이었다. 물론 연습장이라고는 거의 가질 않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매번 스윙이 끝날 때마다 나의 정면과 뒷면 모습을 녹화해서 보여주는 스크린. 처음엔 ‘저게 내가 맞나’ 눈을 의심했고 그 다음엔 ‘지금까지 저렇게 한심한 폼으로 치고 있었다니’ 하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 보기가 역겨워’라는 소월의 시구가 저절로 머릿속에 맴돌 정도로 내 모습 보기가 괴로웠다. 아... 무엇이든 감히 ‘진심인 편’이라 말하려면 진정한 자기성찰이 먼저겠구나. 앞으로 한동안은 ‘나 보기가 역겨워’를 되뇌겠지만 우선 내 모습을 정확하고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개선책을 찾는 것이 진심으로 골프를 대하는, 그리고 진심으로 인생을 대하는 시작점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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