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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ar Chamber, 배드파더스
The Star Chamber, 배드파더스
  • 전성훈 변호사
  • 승인 2021.08.24 12: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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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32)

웨스트민스터궁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1,000년간의 영국의 역사가 녹아 있는 이 건축물은, 우리의 경복궁과 같이 영국을 상징하는 궁전이다. 궁전의 1,100여개의 방에는 이름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름이 있는 방 중에 ‘성실(星室, star chamber)’라는 방이 있다. 이는 천장에 금박 별들이 장식되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 성 훈변 호 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아름다운 이름과 달리, 역사에서 star chamber는 악명 높은 곳이다. 영국에서 가톨릭과 신교의 대립이 극심하던 17세기 초,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는 친가톨릭 정책들을 강행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신교파를 탄압했다. 왕은 신교파 인사들을 star chamber로 잡아와서 재판이라는 이름하에 고문하고 불공평한 판결을 내렸는데, 이를 성실법원(Court of Star Chamber)라고 했다. 우리로 치면, 군사정부 시절의 ‘남산’이라고나 할까. 1641년 의회가 법률로 이를 폐지하기까지 성실법원은 악명을 떨쳤다.

그리고 이와 동명인 ‘The Star Chamber’라는 1983년작 미국 영화가 있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미국 LA 밤거리를 차 한 대가 배회하고 있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차를 세우고 차에 타고 있던 두 남자를 검문한다. 이들로부터는 마리화나 냄새가 났고, 경찰은 차 안에서 피 묻은 신발을 발견한다. 얼마 전 10세 소년이 성추행 후 살해된 사건이 있었는데, 경찰은 이 사건의 용의자로 이들을 체포한다.

하지만 막상 재판이 시작되자, 피고인측은 ‘영장 없이 압수수색했으므로 압수물은 증거로 사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판사 스티븐 하딘은, 피고인측의 주장이 법적으로 타당하기에 증거 채택을 기각할 수밖에 없다. 증거가 없어 무죄를 판결할 수밖에 없게 되자, 살해당한 소년의 아버지는 법정에서 피고인들을 향해 총을 쏘지만, 애꿎은 경관만 희생된다. 감옥에 수감된 아버지는 자살한다. 정의가 구현되지 않고 피해자가 더 큰 고통을 받는 이런 상황을 직접 겪은 이상주의자 하딘은 분노하고 좌절한다.

이를 본 한 선배 판사가 하딘에게 다가와서 자신들의 조직에 가입할 것을 권한다. 덕망 있고 저명한 판사들로 구성된 이 비밀스런 판사 집단은,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 무죄 판결을 받은 흉악범들을 재심리하여 유죄로 판결되면 킬러를 고용하여 처형하는 비밀법원이다. 그 이름은 ‘The Star Chamber’.

하딘은 고민 끝에 조직에 가입하고, 가입 후 자신이 무죄 판결한 소년살해혐의 피고인들에 대한 재심리를 요청한다. 토론 끝에 이들은 만장일치로 피고인들에 대한 유죄를 판결하고, 킬러를 고용하여 피고인들을 처형하도록 지시한다. 하지만 한 흑인 형사에 의해 소년을 살해한 진범들이 검거되자, 하딘은 자신이 무고한 사람들을 지목했음을 알게 되고, 처형을 중지할 것을 이들에게 요구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조직이 영향 받을까 두려워하여 ‘이것이 불가능하며, 그들이 그 소년을 죽이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행실을 볼 때 결국 다른 시민들에게 해를 끼칠 것이니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낫다’는 궤변을 펼친다.

분노한 하딘은 누가 당신들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느냐고 이들을 비난하고, 흑인 형사에게 모든 것을 폭로한 뒤 킬러를 쫓아가 혈투 끝에 무고한 사람의 희생을 막아내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우리는 법과 정의가 동의어라고 생각하거나 적어도 비슷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 초반부에서 보여지기로는 법은 정의 구현의 방해물이다. 여러 정황상 죄인으로 보임에도 법적 ‘절차’ 때문에 처벌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 이 영화는 사회로부터 적법하게 권한을 수여받지 않고 따라서 통제받지도 않는 ‘절차 밖 정의 구현’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헐리우드적 방식으로 역설한다.

‘배드파더스’라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 이는 양육비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고서도 지급하지 않는 부모들의 신상정보를 ‘권한 없이’, ‘동의 없이’ 인터넷에 공개하는 사이트이다. 이 사이트는 수집한 양육비 미지급 부모들의 신상정보를 2018년 7월부터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는데, 이름, 생년월일, 학력, 주소, 직업에다 ‘사진’까지 게시하고 있어서 그 공개의 정도가 높다. 이 사이트의 주장에 따르면 올 초까지 2년여 동안 수천 명의 양육비 미지급 부모들의 신상정보를 공개하여 그 중 수백 명으로부터 양육비를 전부 또는 일부 지급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현행법상 명백한 명예훼손이고, 사이트를 운영하는 대표는 수십 차례 고소당하여 재판받는 중이다. 그리고 올해 2월 헌법재판소는 ‘명예훼손죄는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이들의 생존보다 무책임한 부모의 권리가 더 중요한가? 잘못한 것이 분명한데도 부모의 명예를 보호해야 하나?’ 첫째 무책임한 부모의 권리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모의 권리를 ‘권한 없이’ 침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 죄인의 명예도 보호되어야 하고, 하물며 이들은 민사상 채무자에 불과하여 죄인도 아니다. 무엇보다 ‘당신 말이 맞던 안 맞던 ‘당신은’ 그럴 권한이 없다.’

비록 정부가 올해 7월부터 ‘고의적’ 양육비 미지급 채무자에 대한 운전면허정지, 출국금지, 명단공개 조치 등을 시행하기 시작했고, 위 사이트는 올 10월 운영을 종료하기로 했지만, ‘사적 정의 구현’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분쟁이 발생하면 변호사를 찾지 않고 온라인에 글을 올려 해결하려는 세태는 여전하고, 일부 사람들이 ‘피해자의 고통’을 앞세워 절차를 경시하거나 단축하려 시도함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의료분쟁 발생 시 법이 정해둔 절차를 경시하고 의료기관 앞에서 1인시위를 하거나, 절차를 단축하기 위해(=빨리 돈을 받기 위해) 불필요한 형사고소를 남발하는 것처럼 말이다.

‘망신주기’는 별도의 형벌이 되므로 국가도 이를 엄격하게 제한하여 부과한다. 그래서 성범죄자의 신상공개 여부조차 각 사건마다 판사가 매번 판단한다. 코로나 사태에 대한 대응에서 보듯이, 우리는 이제 자타공인 선진국이다. 이제 절차에 대한 불신을 외치면서 ‘내가 하겠다’며 사적 망신주기에 나서는 사람들에게 사회가 관대할 단계는 지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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