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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사산악회원 산행기] 서울 둘레길
[서울시의사산악회원 산행기] 서울 둘레길
  • 의사신문
  • 승인 2021.08.18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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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기 원장(서초·서래성형외과의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늙고 병듦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안타까운 욕심들이 일을 내고야 말았다. 들어가면 안 되는 영역의 금줄을 끊고 들어간 자들의 무책임이 전 인류를 공포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페스트가 그랬고, 메르스, 에볼라가 그랬다. 진작 영화로 나왔던 상상의 이야기가 그대로 현실에서 재현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피해갈 수 있었으면서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인간 군상의 씁쓸한 어리석음이라고나 할까.

누구의 실수이든, 누구의 욕심일지라도 그 욕심과 실수의 피해자는 너와 남이 따로 없는 세상이 되었다. 나와 전혀 일면식도 없는 인간이 박쥐가 죽어가는 것을 즐기고, 천산갑이 맛있어 보여 군침을 흘렸다. 그런데 그 일이 나로 하여금 산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열락을 포기하게 만들 줄은 누가 알았을까? 굳이 양자역학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나비의 날갯짓으로 태풍이 분다는데 하물며 박쥐의 단말마야. 

산에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환자들에게 웃음을 보이던 내 얼굴에 우울함이 내려앉았다. 코로나로 인한 집합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혼자서 산에 다니던 고독한 즐거움을 다시 느끼기에는 내 주위에 너무 사랑하는 산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이게 다 서울시의사산악회 덕분이다. 

존경하는 선배님들, 사랑하는 동료들, 그리고 우러러 보이는 아우님들. 이제 산에, 그리고 친구에 중독이 되어 그 얼굴들을 꼭 봐야 하는데 그 사람들과 같이 버스로 이동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 멀리 단체로 가는 산행은 힘들어진다. 

절망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허둥대고 있는데, 나의 보스 박석진 선생님이 아이디어를 냈다. “서울 둘레길을 돕시다.” “재미있어요?” 나는 물었다. 흰 이를 드러내는 큰 미소로 답을 하는 박 선생님 옆의 문상은 등반대장님의 표정은 이랬다. “너만 모르고 있어, 얼마나 좋은데”

이렇게 서울둘레길 탐방이 시작되었다. 2019년 12월 4코스를 시작으로 2021년 7월까지 8개의 구간을 완주했다. 물론 둘레길만 돈 것은 아니다. 코로나방역조치가 강화될 때에는 서울 둘레길을 탐방하고 방역조치가 완화되는 사이사이에는 호령곡산, 내장산, 검단산, 북한산, 북한산 열두대문 등을 다녀왔다. 

                                                                 서울 둘레길 4구간 전경

처음의 우려와는 다르게 서울 둘레길은 잘 정비되어 있고, 몇몇 구간은 높이는 높지 않지만 한 번에 걷기에는 좀 멀고 힘들었다. 날이 덥거나 비님이 많이 오시면 오히려 완주하기 벅차기도 했다. 산에 갈 때마다 노모께서 하시는 말씀이 떠올랐다. 살면서 넘어지는 것은 오르막이 아니라 내리막길이고, 세상 어느 언덕도 방심하면 안 된다고. 

2019년 12월에 처음 시작한 4코스는 수서역에서 대모산, 구룡산, 여의천 및 양재천 우면산을 거쳐 사당역에 도착하는 코스이다. 조망이 좋고 접근성이 좋아서 중간에 다른 회원들과 합류하기가 좋았다. 겨울이라 황량하기는 했지만 모두들 들뜬 마음으로 출발했다. 둘레길이 처음인 나는 보물을 발견한 듯한 기쁨에 들떠서 경쾌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양재시민의 숲에 있는 KAL 858 희생자 추모비와 유격백마부대 충혼탑이 나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 나는 어린 마음에 얼마나 당혹스럽고 울분에 찼던지, 그리고 또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고 사는지. 그 돌아가신 분들의 영령 앞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나 혼자 이런 생각을 하고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데, 옆에서 조해석 선생님이 한마디 거드셨다. “참! 우리가 무심하죠?”

4코스를 다녀온 다음으로는 2020년 9월에 2코스를 다녀왔다. 묵동천, 망우산, 망우산, 아차산을 통과하는 코스이다. 중랑캠핑 숲, 망우묘지공원, 해맞이 광장, 아차산 생태공원, 목동천, 아차산성이 있다. 아마도 가장 조망이 좋은 코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공준택 선생님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풍광에 더해져 즐거운 탐방이었다. 

눈이 내리는 12월에는 3코스를 두 번에 나누어 다녀왔다. 3-1 코스는 광나루 역에서 출발하여 광진교를 건너고 한강공원과 암사동 유적을 지나 고덕산 정상 및 샘터공원에서 일자산 초입 그리고 고덕역으로 내려오는 코스이다. 눈이 내리는 88도로를 옆에서 망루에 올라 얼은 손으로 과자를 나누어 먹던 얼굴들이 그립다. 눈이 와서 모든 것이 하얗게 평등한 세상이 되었는데 그 사이 하얀 입김과 드러난 하얀 치아들이 예뻤다. 3-2 코스는 고덕역에서 일자산을 거쳐 수서역으로 내려오는 코스이다. 코스가 길어서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로 지루하지 않게 걸었다. 미리 탐방로를 내려가 음식점을 알아봐 주신 이창명 선생님 덕분에 탐방후의 음식이 더욱 맛났다.

5코스는 관악산 코스로 사당역에서 출발해 관악산, 삼성산을 거쳐 석수역에 도착하는 코스이다. 대부분 숲길이고 비교적 난이도가 있다. 관악산은 대학시절 주말마다 찾던 산이다. 토요일 오후 수업이 끝나면 작은 배낭안에 버너와 코펠을 꾸려서 혼자 버스를 타고 관악산에 와서 연주봉 정상 근처에서 라면 하나를 끓여 먹고 오는 것이 나에게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세상에 나 혼자 던져졌다는 느낌은 쓸쓸하기보다는 자유로웠고, 무기력함을 느끼게 하기 보다는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 때부터 혼자 산에 다니는 버릇이 있었고 그렇게 혼자 산에 있는 고독은 칼날을 핥으며 자기 피 맛을 보고 조금씩 스러져가는 시베리아의 늑대를 생각하게 하는 자학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랬던 나를 적극적으로 서울시의사산악회에 이끌어 주신분이 연재성 선생님이시다. 나에게는 영원한 ‘연대장님’ 이시고.  

                                             서울 둘레길 6구간 전경

코스는 석수역에서 출발해서 안양천을 따라 걷다가, 마침 학회를 마치고 오시는 유승훈 회장님을 만나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얻어먹고 한강에 다다라서 가양역으로 가는 코스였다. 우리가 6코스를 걸을 때에는 4월이어서 조금은 더웠다. 그러나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아서 날씨 좋은 날의 샌프란시스코를 생각나게 했다. 행복이라는 것도 재미라는 것도 가까운 주위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넋 놓고 걷고 있었다. 내가 정신이 나간 것을 눈치 챘을까 갑자기 숲속에서 강아지가 사납게 짖으며 달려 나왔다. 넋을 놓고 걸으나 긴장하고 걸으나 놀라기는 한가지라는 생각에 세상사는 것을 미리 대비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는 사이 이종호 선생님이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나를 지나쳐 가셨다. 

7코스는 6월에 다녀왔다. 가양역에서 출발하여 난지도라고 불렸던 노을공원, 하늘 공원을 통화하여 월드컵 경기장을 거쳐 봉산, 앵봉산을 넘어가는 코스이다. 날은 좋았지만 더웠다. 아파트 뒷산 체육공원에서 모두 지쳐 쉴 때에 턱걸이로 힘을 뽐내시던 박진용 선생님이 부러웠다. 

8코스는 6월과 7월 두 번에 나눠서 다녀왔다. 처음에는 하루에 끝내려고 계획을 세웠지만 길이가 17 km에 달해 무리라는 결론이 났다. 북한산 둘레길을 이용해 통과하는 노선이다. 아마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둘레길 중의 하나가 아닐까한다. 북한산 생태공원, 탕춘태성암문, 성북생태체험관, 빨래골 지킴터, 이준열사 묘소, 419묘지, 봉황각, 김수영 문학관등이 있다. 

4.19묘지 앞에서 난 내가 속한 공동체에 어떤 이바지를 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잠깐 부끄러워졌다. 나는 내 앞가림도 잘 못하지만 우리 산악회에는 안과의사회장으로 봉사하시는 황홍석 선생님이나 서울시의사회 공보이사이신 유승훈 선생님, 그리고 전 마포의사회장이신 박석준 선생님처럼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의사들을 위해 일하는 분들도 여러분 계신다.

아껴두었던 1코스는 7월에 다녀왔다. 1코스는 도봉산역에서 수락산, 불암산을 거쳐 화랑대역에 도착하는 코스이다. 대체적으로 완만하고 숲길이지만 다녀온 날은 기온이 섭씨 36도를 넘었고, 준비해 간 물을 모두 마셔버려서 당고개 역에서 내려와 편의점에서 물을 샀다,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사서 방역조치를 지키기 위해 처마 밑 그늘에서 간격을 두고 일렬로 서서 먹었다. 전명숙 선생님이 가장 맛있게 드셨다. 천진난만한 개구장이 같은 전 선생님이지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이제는 파랑길을 틈틈이 돌고 계신단다. 

나는 이번 둘레길을 돌면서 무의식적으로 산 정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핀잔을 들었다. 내가 길을 잘못 들면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이 쓸데없이 걷는 수고가 더해진다. 그래서 노민관 선생님은 일부러 천천히 따라온다고 예의 그 빙긋한 미소로 말씀하신다. 성격이 급한 나는 언제나 여유를 잃지 않는 노선생님과 느긋한 조철현 선생님이 정말 부럽다. 불암산을 다 내려와서 이미 한 코스를 더 다녀오신 양종욱 선생님을 만났다. 양 선생님은 산에서 발목을 크게 다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주치의에게 등산은 이제 힘들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다는 양 선생님,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여전히 산길에서는 나보다 빠른 양 선생님, 나는 여쭈어 보았다. “아프지 않으세요?” “아프지, 하하”

2019년 12월에 시작한 서울둘레길 순례가 2021년 여름에 끝났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한 바퀴 돌았다는 뿌듯함과, 그동안 서울을 너무 몰랐다는 부끄러움, 그리고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격려해주신 서울시의사산악회 여러 선생님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 뒤섞여 내 인생의 행복한 한 부분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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