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 할매’ 만세
‘탁구 할매’ 만세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08.18 10:1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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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26)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영어 철자로는 ‘Ni Xialian’. 미디어에서 ‘니시아리안’이라고들 많이 쓰지만, 이 중국 이름의 정확한 우리말 표기는 ‘니샤렌’이다. 우리식 한자 발음은 ‘예하련(倪夏蓮)’으로,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예(倪)’씨는 중국 성씨 중 116번째로서 현재 백이십만 명 조금 넘는 숫자라고 한다. ‘어린아이’란 뜻이 있는 ‘예(倪)’씨 성에, ‘여름(夏) 연꽃(蓮)’이란 예쁜 이름을 가진 이 사람이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선물해 준 감흥이 적지 않았기에 난 꽤 한참 동안 인터넷 검색을 해보게 되었다. 
  
중국 태생으로 20대 후반 룩셈부르크에 귀화한 니샤렌이 한국 여자탁구의 신예 신유빈과 짜릿한 여자 단식 경기를 펼쳤을 때, 거의 모든 국내 언론들은 두 사람의 나이 차이에 주목했다. “17세 신유빈, 58세 니시아리안에 역전승”, “신유빈, 41살 많은 변칙 니시아리안에 4-3 역전승” 등과 같은 식의 헤드라인이 넘쳐났다. 니샤렌의 플레이가 워낙 독특했던 터라 네티즌들은 경기 중에 그녀에게 실시간으로 ‘탁구 화석’, ‘탁구 할매’ 등등 다양한 별명을 지어주었다. 본명처럼 예쁜 별칭을 기대하는 건 1963년생인 그녀에게 애초부터 무리였나보다.
  
하지만 ‘국민 할매’ 소리를 듣던 가수 김태원도 처음엔 그 별명에 충격을 받았으나 나중에 초등학생들까지 자기를 친숙하게 ‘국민 할매’라 부르는 걸 보고서 오히려 전 세대를 아우르는 로커가 된 것 같아 뿌듯했다고 한다. 그러니 니샤렌도 대한민국 네티즌들이 ‘탁구 할매’라 부르는 것 정도는 인기가 반영된 애교로 받아줄 수 있으리라. 사실 과거 외신을 찾아보면 니샤렌이 50세가 넘어갈 무렵부터 그녀의 게임을 다룬 기사에 ‘table tennis grandma’란 표현이 등장하고 있으니 이 별명의 저작권은 우리에게 있는 것 같지 않다.
  
신기하게도 우리 병원 탁구부원 중에 니샤렌의 경기를 보면서 내 생각이 났다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중국식 펜홀더 라켓의 전면에 롱 핌플 러버, 후면에는 숏 핌플 러버를 붙인 채로, 탁구대에 바싹 붙어서 별로 큰 움직임도 없이 구석구석 코너를 찌르는 그녀의 모습이 내가 추구하는 탁구 스타일과 상당히 비슷한 건 사실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런 류의 탁구를 자꾸 ‘변칙’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지금 50대 이상의 사람들은 대개 어릴 적 일본식 펜홀더(penholder) 라켓으로 탁구를 시작했다. 한쪽 면에만 러버를 붙인 직사각형 모양의 블레이드를 펜처럼 쥐고서 플레이하는 방식 말이다. 그러다가 양면에 러버를 붙인 둥그런 쉐이크 핸드(shake-hand) 라켓이 대세가 되자 다들 그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쉐이크 핸드 전형이 워낙 백사이드 공격과 수비에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어떻게든 탁구 실력을 늘려보고 싶었기에, 익숙한 펜홀더를 버리고 쉐이크로 가야 할지 고민이 꽤 됐다. 심사숙고 끝에 내가 택한 방식은 라켓을 바꾸는 게 아니라 러버를 바꾸는 것이었다. 만질만질한 민러버에서 벗어나 겉에 오돌토돌한 돌기가 나와 있는 핌플 러버로.
  
핌플 러버는 민러버와 구질이 전혀 다르다. 대부분 상대의 회전을 무력화시키며 무회전 공을 많이 만들어 낸다. 돌기가 긴 롱 핌플쪽으로 갈수록 회전이 종잡을 수 없고 낮게 깔리거나 지그재그로 날아오는 기묘한 구질들이 나타난다. 나도 처음엔 옛날 현정화 선수가 사용하던 ‘스펙톨’이란 이름의 숏 핌플(정확한 표현은 pimple-out)을 써보았으나 상대가 별로 어려워하지 않아 과감하게 중국 ‘자이언트 드래곤’사에서 나온 ‘612’란 이름의 러버로 바꿨다. 이건 숏 핌플도 롱 핌플도 아닌 이른바 ‘미디엄 핌플’로 분류되며 상대하기가 까다롭기 그지없다. 물론 그만큼 본인이 다루기도 어려워서 익숙해지기까지는 상당한 연습량이 필요했지만.
  
나의 탁구 이력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까닭은 이런 핌플 전형이 좀 드물어서 그렇지 절대로 무슨 ‘변칙’이나 ‘사술(邪術)’이 아님을 말하고 싶어서다. 구질을 까다롭게 만들면서 동시에 큰 몸동작을 쓰는 탑스핀, 그러니까 ‘드라이브’ 같은 타법은 구사하지 않으니 체력도 훨씬 덜 소모되고 경기를 주도하게 된다. 소위 ‘동네 탁구장 고수’로 불리는 사람들 중에는 핌플을 만나면 손 한번 못 써보고 맥없이 나가떨어지는 분들이 많다. 러버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데 꼭 지고 나서 그들은 ‘사기당했다’는 식으로 핌플 사용자를 비난하거나 느닷없이 핌플 퇴출론을 펼치기도 한다.
  
나는 종종 내가 선택한 탁구 스타일이, 경쟁에서 기존의 틀을 따르지 않고 아예 판을 바꾸는 전략과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초고수들은 예외지만 대부분의 상대는 내 페이스에 끌려오는 경우가 많다. 당황해서 자기가 가진 장점을 발휘할 기회마저 잃고 허둥대다가 결국 경기에서 지게 된다. 약간의 자만심이 깃든 나의 ‘탁구론’인데 이게 어쩌면 회사 경영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판을 흔드는 전략’. 딱 우리 원자력병원이 취하고 싶은 방향이다. 대형병원 암센터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버린 마당에 이제 우리는 ‘핌플’ 러버를 꺼내 들어야 한다. 그게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신약 개발일 수도 있고, 골육종 같은 희귀암에 특화된 첨단 센터일 수도 있다. 아니면 과학기술부 산하기관답게 정부출연연구소들의 암 연구를 집중지원 하는 거대한 R&D 플랫폼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핌플 러버를 장착한 라켓은 나 자신에게도 매우 어려운 무기라 혹독하고 부단한 연습이 필수적이지만. 
  
탁구 할매 니샤렌은 도쿄올림픽 공식 홈페이지에 “오늘은 늘 내일보다 젋다. 나이는 장애가 될 수 없다.”란 말을 좌우명으로 소개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녀는 1963년생으로 원자력병원과 나이가 같다. ‘젊은’ 탁구 할매 니샤렌이 핌플 러버 신공을 펼치는 걸 앞으로도 오랫동안 보고 싶다. 우리 병원 사람들이 그녀의 핌플 러버 사용법을 가끔 벤치마킹할 수 있도록 말이다. 탁구 할매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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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킴 2021-08-30 10:21:46
귀한 핌플전형이시군요. 기회가 되면 한 수 배우고 싶습니다. 저도 나이들면서 니샤렌 스타일로 가야 될 것 같더라고요. 가끔 뭐라고 하시는 분도 있지만 탁구는 힘겨루는 경기가 아니잖아요~^^

탁구할배 2021-08-20 09:04:42
민러버 보다는 평면러버(정확한 표현은 pimple-in)으로 표기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