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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들과의 대화
검사들과의 대화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08.0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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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25)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서울 북부지방검찰청은 원래 북부지방법원과 함께 공릉동 원자력병원 근처에 있었다. 그 부근에 닭칼국수집이며 콩집이며 맛집들이 많아 병원 식구들도 자주 찾던 동네다. 청사는 전형적인 관공서 스타일의 오래된 건물이라 위압감보다는 소박하고 청렴한 느낌을 주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2010년도에 검찰청과 법원이 도봉동에 나란히 새 건물을 짓고 이사를 가버렸다. 이후 근처를 지나다 우연히 마주친 북부지검의 새 청사는 번쩍거리는 초현대식으로 변해서 소위 ‘각이 딱 잡힌’ 건물이 풍기는 엄숙함이 옛 친숙함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칼 모양의 검찰 마크가 뿜어대는 날카로운 권위는 괜히 옷매무새까지 다듬게 했다. 속으로 ‘일생에 여기 올 일은 없어야 한다’라고 되뇌었음은 물론이다.
  
별로 가고 싶지 않은 이곳에서 몇 년 전 갑자기 나를 오라 했을 때 긴장이 좀 됐다. 각종 형사사건의 의료자문과 관련해서 검사장님이 인근 병원장들을 초청한 것이었지만 그간 영화나 언론 등을 통해 머릿속에 각인된 검찰의 온갖 부정적 이미지가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뭔가 ‘부탁’을 가장한 ‘지시’ 같은 걸 하고서 빨리 서명하라고 냅다 문서를 내밀지 않을까 하는, 망상 수준의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당연히 그건 억측이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 검사들과 오찬을 함께 하며 잠시나마 그분들의 애환을 들어볼 수 있었다. 
  
오찬 후 검사장님이 청사 구경을 시켜주셨는데 강당 이름이 ‘이준 홀(hall)’이라는 게 특이했다. 알고 보니 구한말 고종의 특명으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갔다가 순국한 이준 열사가 대한제국 1세대 검사였다고 한다. 검찰은 이준 열사의 정신을 본받자며 가끔 학술 심포지엄도 연다고 한다. 아무튼 이날 이준 열사는 시작에 불과했고 역사관처럼 꾸며진 청사 한 모퉁이 전임자들의 이름이 나열된 벽 앞에서 검사장님은 명패를 하나씩 짚어가며 그분들의 업적에 대해 오랫동안 설명을 하셨다.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사 견학이 끝날 때쯤 차장검사님이 농반진반 이런 이야기를 했다. “검찰청사가 들어서기 전에 이곳은 국군 창동병원이었답니다. 여기 터가 아픈 환자들이 있었던 장소라 그런지 우리 직원 중에도 이상하게 요즘 아픈 분들이 많습니다.” 어색하게 미신을 인용했지만 형사사건의 의료자문 이외에 검찰청 직원들의 건강상담도 필요하다는 말씀을 에둘러 하시는 것 같았다. 사건 자문이건 건강상담이건 흔쾌히 해드릴 수 있으니 언제든 연락하시라 하고서 돌아왔는데 몇 일 뒤 진짜로 검사 한 분이 두꺼운 의료기록을 들고 우리 병원에 찾아왔다.
  
그분이 들고 온 것은 뜻밖에 형사사건과 관련된 기록도 아니었고 검찰청 직원의 병원 차트를 복사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34세의 나이에 림프종에 걸려 세상을 떠난 한 동료 검사의 사망 경위 조사서였다. 2015년에 임관한 검사가 지방검찰청에 근무하다가 2018년 림프종 진단을 받았고 병가 중에 서울북부지검으로 전보된 뒤 갑작스러운 병세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평소 건강하고 예의 바르던 그가 업무상 과로로 인해 병을 얻었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면서 이것이 순직임을 입증하기 위해 동료들이 발 벗고 나선 것이었다.
  
그 기록을 들여다보며 나는 검사들의 무시무시한 업무량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인의 경우 지방청에 근무할 때 400일의 근무일 중 275일 야근을 했고 자정 넘어 퇴근한 날이 135일이라고 컴퓨터 로그인 기록에 나와 있었다. 매달 100건 넘는 사건을 배당받았다는데 이게 어느 정도의 일감인지 내 머리론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기록을 검토한 뒤 우리 병원 혈액종양 전문의와 상의하여 ‘업무상 과로나 스트레스가 림프종의 발병 혹은 악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라는 취지의 소견서를 작성해주었다. 교과서적이고 일반적인 언급이었기에 이게 법원에서 얼마나 영향을 발휘했을지는 알 수 없다. 
  
작년부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많은 모임들이 취소됐지만 다행히 몇 달 전 북부지검 청사에서 오랜만에 의료자문위원회가 열렸다. 그 사이 새로운 검사장님이 오셨는데 나는 그분께 이전에 소견서를 써드렸던 림프종 검사의 순직 인정 여부부터 확인했다. 안타깝지만 지금까지도 법원에서 다투고 있어서 결론이 안 났다고 한다. 수많은 동료 검사들이 달라붙어 과로와 발병의 인과관계를 밝히려 무진 애를 썼을 텐데 그게 그토록 입증하기 어려운 일이었나 보다. 정치와는 관계없이 그저 하루하루 몸 바쳐 일할 뿐인 성실한 검사들조차 정작 사고가 났을 때 법의 보호를 받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이후 창밖으로 북한산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회의실에서 검사장님과 도시락 오찬을 함께 하며 나누던 대화는 이내 검사들의 SNS 활동 이야기로 이어졌다. 직장에서 평소 보이는 모습과 도저히 매칭이 안 되는, 그저 SNS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로 영웅 행세를 하는 일부 검사들에 대해 검사장님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으나 발언을 자제하시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병원 의사들도 마찬가지라고 얘기했다. 허구한 날 SNS에 허세 가득한 글을 올리는 일부 의사들에게 사이버상에서만 정의의 사도인 척하지 말고, 오늘 눈앞에 있는 환자들에게 먼저 충실하란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검사장님과 나는 강력한 동병상련의 기운을 서로 느꼈다.
  
서울북부지검 검사장님은 최근 타지역 지검장으로 발령받아 내려가시면서 멋진 책을 하나 소개해주었다.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이란 제목으로, 부하직원인 정명원 검사가 불과 몇 일 전 펴낸 ‘검사의 이야기’다. 과장이 없고, 자랑이 없고, 핑계나 남 탓이 없는 진솔한 검사의 이야기다. 유머와 위트가 있으며 유려한 문장이 있고 감동이 있는 평범한 검사의 이야기다. SNS를 달구는 검사들 혹은 검사 출신들의 글이 큰소리로 혼자 길에서 외치는 것이라면 정 검사의 이야기는 마치 함께 차를 마시면서 따뜻한 대화를 나누는 것만 같다. 기회가 되면 나도 그에게 병원과 의사들 이야기도 들려주고 싶다. 어쩌면 신기한 동병상련을 느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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