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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문제에 대한 다소 비관적인 전망
저출산 문제에 대한 다소 비관적인 전망
  • 전성훈 변호사
  • 승인 2021.08.03 09: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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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30)
전 성 훈변 호 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 성 훈변 호 사법무법인(유한) 한별

남녀가 만나기는 쉽다. 하지만 헤어지기는 어렵다. 게다가 남녀가 만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필요에 의해 이를 제도적으로 공인받은 경우라면, 헤어지기는 더 어렵다. 그래서 남녀 간의 이별은 수많은 유행가 가사를 낳았고, 남녀 간의 이혼은 수많은 법원 판결을 낳았다.
  
이혼의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그 형태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남편이 아내를 가정에서 추방하는 ‘축출이혼’이었다. 궁핍과 물리력이 개인과 사회를 지배하던 시대, 이른바 가부장권이라는 이름 아래 이혼은 사실상 남편의 권리였다. 물론 가문을 등에 업은 귀족 여성이나, 짬짬이 있었던 풍요의 시대, 흔히 태평성대라고 일컬어지는 시기에는 평민 여성의 이혼권도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 비록 다시 궁핍 또는 전쟁의 시대가 되면, 여성은 굶지 않기 위해 또는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혼의 자유는 다시 썰물처럼 저 멀리 빠져나갔지만 말이다. 
  
박인덕이라는 인물이 있다. 1896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관통하면서 여성운동가, 언론인, 사회사업가로 활약했던 사람이다. 그녀는 법조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인데, 한 가지 법조계에 유의미한 행적을 남긴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 최초로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한 아내’라는 것이다.
  
이혼 자체가 흔치 않던 시기에, 심지어 아내가 남편에게 위자료까지 주면서 이혼했으니, 당시 큰 화제가 되었고 당연히 부정적인 여론이 컸다. 하지만 세상에 이유 없는 결과가 어디 있겠는가. 박인덕이 ‘세기의 이혼’에 이르게 된 경위를 한번 살펴보자.
  
평생 글만 읽으며 과거 시험을 준비한 가난한 선비였던 박인덕의 아버지는, 그녀가 일곱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과부가 된 어머니는 생활고 때문에 다시 친정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하나 남은 자식인 박인덕이 딸임을 한탄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그녀에게 공부를 시키기로 결심했다.
  
100년 전에 가난한 홀어머니 밑에서 여성이 공부하는 것이 쉬웠겠는가. 하지만 박인덕은 무작정 상경하여 이화학당 교장에게 ‘공부시켜 달라’고 요구했던 당돌함과 의지로 숱한 난관을 헤쳐 나갔다. 그리고 이화학당 재학 시절은 박인덕의 heyday였다. 공부, 운동, 노래 등 못하는 것이 없고 외모까지 출중한 그녀는 이화학당이 낳은 ‘스타’ 여성운동가였다. 그리고 그녀를 만난 20대의 ‘청년부호’ 김운호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남녀가 만나기는 쉽지만, 이 남녀의 만남은 쉽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김운호가 ‘유부남’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친구들은 유부남과의 결혼에 극력반대했지만, 박인덕은 유부남의 구애를 뿌리치지는 않았고 처와 이혼할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김운호는 10여 년을 같이 산 구여성인 처를 ‘축출이혼’했고, 신여성 박인덕과 1920년 정동예배당(현 정동제일교회)에서 결혼했다.
  
문제는 결혼한 지 한 달만에 운영하던 사업이 차례로 도산하면서 김운호가 경제적으로 몰락했다는 것이다. 결국 시댁에 더부살이하면서, 박인덕은 학교에 출강하고 가정교사까지 하면서 혼자서 친정어머니, 시어머니, 두 딸과 무위도식하는 남편을 부양해야 했다.
  
이 ‘극한상황’에 대한 돌파구로 박인덕은 미국 유학을 결심했고, 1926년 유학을 떠나 공부를 마치고 1931년 귀국했다. 그리고 박인덕은 귀국 직후 ‘가정을 떠나 사회로!’를 선언하며 ‘이혼 및 양육권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남편이 자식 양육의 대가로 위자료를 요구하자, 위자료 2천 원(현가 2억 원 추정)를 주고 자녀의 양육권을 인정받았다. 미국에 유학하면서 매달 양육비를 보내준 박인덕으로서는 화가 났겠지만, 그녀는 남편의 과거 행실에 대한 비난보다는 자신의 장래의 인생을 더 중시하는 합리적인 결정을 했다.
  
수많은 남자들의 구애를 받던 24살의 박인덕이 왜 하필 유부남을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100년 전, 여성을 대등하게 인정하는 남성은 극소수였을 것이고, 어차피 이런 생각을 가진 결혼 적령기 남성을 만나기 어렵다면, 차라리 성장기에 겪었던 경제적인 고민을 하지 않게 해 줄 수 있는 남성을 만나고 싶었을까. 물론 그녀의 선택은 드라마틱한 실패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남성의 경제력은 결혼에서 중요한 파라미터이다. 더 이상 궁핍과 물리력이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기에, 현대 여성들에게 결혼은 필수가 아니고 선택이다. 그리고 인생을 건 ‘주사위 던지기’인 결혼에 대해 여성들은 더 확실하고 높은 기준을 바란다. 반면 부의 편재가 심해지면서 평범한 남성들이 결혼을 위해 할 수 있는 준비 수준은 그다지 높아지지 않았다. 따라서 남성들이 ‘관습’에 기대어 비교적 쉽게 결혼할 수 있었던 시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인구는 늘었음에도 혼인건수 자체가 1996년 43만 건에서 2020년 21만 건으로 떨어진 것이나, 인구 1천 명당 혼인건수가 1980년 10.6건에서 2020년 4.2건으로 떨어진 것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국가적 위기인 저출산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결혼한 부부들에게 단돈 몇십만 원 주면서 아이를 낳으라고 권유하는 구태의연한 방법보다는, 결혼 자체가 늘 수 있도록 청년층을 지원하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또한 결혼하지 않아도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사회적 지원제도 수립은 필수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정상 가족’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결혼 후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멀쩡한 우리 국민인 미혼모 자녀의 절반 가량은 해외로 입양을 보내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43만 쌍의 부부가 2명씩 낳아야 유지될 인구를, 21만 쌍의 부부가 4명씩 낳아 유지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살색’을 ‘살구색’으로 바꿀 것을 권고한지 20년이 되었음에도 출산 관련 정책은 여전히 ‘다수’와 ‘정상’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저출산 문제는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다소 비관적인 전망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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