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5:22 (금)
‘공트럴 파크’에 필요한 것
‘공트럴 파크’에 필요한 것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07.06 09: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릉역 2번 출구 (22)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나는 서울의 서대문구 창천동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흔히 ‘연대 앞’, 혹은 ‘신촌’으로 불리는 곳이다. 그 동네 아이들이 누렸던 일종의 특혜는 인근 대학 캠퍼스들을 세련되고 멋진 놀이터로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널따란 연세대학 운동장에서 때때로 축구와 야구를 즐겼고, 가을 단풍이 수려한 이화여대에는 미술학원 친구들과 그림을 그리러 종종 갔었다. 나이가 들면서도 이런저런 일로 두 학교에 들를 때가 가끔 있었는데 매번 캠퍼스의 모습이 이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는 것에 놀라곤 했다. 과거에는 익숙했던 길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로 새로운 건물들이 끊임없이 들어선 탓이었다.

출근길 동부간선도로에 진입해서 북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좌측에 한양대학교 캠퍼스가 보인다. 학교가 높은 곳에 위치해서 멀리서 지나는 운전자들 눈에도 잘 띈다. 그런데 이곳도 날이 갈수록 새 건물들이 속속 지어져서 요즘은 학교가 산 위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빌딩들이 수북하다. 연대, 이대, 한대처럼 몇몇 학교들은 이처럼 직접 목격했기에 외형상의 변화를 실감하지만 이런 식의 팽창지향, 건설지향의 트렌드는 어느 대학이나 마찬가지일 듯싶다. 건물 짓기가 곧 총장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지표로 간주되는 분위기니까.

실은 우리 기관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병원이 자리 잡은 공릉동 노원로 75의 대지면적은 2만 평(坪)가량 된다. 입사 당시에는 넉넉한 평지 주차장에다 테니스코트가 4개나 있었을 만큼 공간적 여유로움을 누리던 곳이었다. 하지만 부지 내에 다양한 건물들의 추가 설치 계획이 진행되면서 테니스코트는 이내 주차타워와 신약개발센터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각종 건설공사가 진행되는 걸 지켜보는 내 마음은 늘 이중적이었다. 건물을 짓는다는 게 과연 공간을 넓히는 건지, 오히려 답답하게 쪼그라뜨리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병원 앞마당에 수술장을 현대식으로 크게 신축할 때 있었던 일이다. 현장 감독을 맡으셨던 분이 깜짝 놀라 뛰어오셨다. 땅을 파는 중에 문인석이 나왔다고 한다. 왕릉 같은 데 세워두는, 사람 모양의 석상을 형태에 따라 문인석(文人石) 혹은 무인석(武人石)으로 부른다. 근처에 태릉, 동구릉 같은 왕릉이 있는 터라 출토된 게 혹시 문화재급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놀라신 거다. 다행히 그 정도 가치는 아닌 것으로 판명되어 공사는 계속 진행됐지만 그때 난 차라리 문화재 발굴 때문에 우리 앞마당이 그대로 보존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병원 뒷마당에 신약개발센터를 지을 때는 터파기 공사에서 발견된 암반이 문제였다. 만만치 않은 암반을 깨부수려니 착암기 같은 중장비들이 잔뜩 동원되었고 매일같이 ‘따다다다’ 하는 엄청난 소음이 발생했다.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던 나는 활주로 근무자들이 쓰는 소음방지용 귀마개 헤드폰을 주문해서 한동안 착용해야 했다. 그러면서 차라리 암반이 절대로 깨지지 않아 그냥 흙을 다시 덮고 뒷마당을 온전히 복구하면 좋겠단 생각을 살짝 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마당과 건물을 맞바꾸는 작업이 여러 차례 있어 왔지만 우리 기관에는 여전히 녹지(綠地)로 남아 있는 약 3천 평 정도의 동산이 있다. 여기에 건물을 못 올린 이유는 순전히 그 땅이 ‘비오톱(biotope)’ 1등급으로 묶여 있어서다. 정의상 ‘특정한 식물과 동물이 하나의 생활공동체를 이루어 다른 곳과 명확히 구분되는 생물서식지’를 ‘비오톱’이라 일컫는데 1등급이면 절대적으로 보존해야 하는 곳이기에 규제 풀기가 그린벨트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실상은 식물이라고 해봐야 잡초와 잡목만 무성하고 거기에 생활공동체를 이룬 동물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이었기에 이 땅을 ‘접근불가’에다 ‘개발 불가’ 지역으로까지 정해 놓은 서울시 조례가 야속했다. 애사심에 가득 찬 직원 한 사람은 몰래 잠입해서 그곳 생태계를 조금씩 멸절시키겠노라 결의를 다지기도 했는데, 보존가치가 없음을 확실히 드러내어 개발 허가를 받아내겠다는 초현실적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 즈음 불암산에서 내려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야생 멧돼지 한 마리가 비오톱 지역을 휘젓다가 병원 마당에까지 출현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경찰이 병원 밖에서 사살했지만 우리 비오톱은 졸지에 ‘멧돼지도 명랑하게 뛰놀 수 있는 소중한 생태환경’이란 ‘개발 불가’의 명분을 얻은 셈이 됐다.

이제 ‘공트럴 파크’ 이야길 해야겠다. 옛 경춘선 철길 구간을 서울시가 공원으로 조성해 놓자 그중에 원자력병원 근처 공릉동 구간을 사람들은 ‘공트럴 파크’라 부르기 시작했다. 주변으로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이 조르르 늘어섰다. 일찍이 연남동의 옛 경의선 철길 부근 공원이 뉴욕의 센트럴 파크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하여 일약 ‘연트럴 파크’란 별명을 얻었다더니 ‘공트럴 파크’는 이 ‘연트럴 파크’의 ‘짝퉁’, 아니 ‘스핀오프’쯤 되지 않을까 싶다.

오리지널 센트럴 파크는 동서 0.8km, 남북 4km로 엄청나게 큰 도심 공원이다. 유럽의 모나코보다 면적이 넓다. 1981년 사이먼과 가펑클의 재결합 공연이 센트럴 파크의 한쪽 잔디밭 (Great Lawn)에서 열렸을 때는 50만 명 넘는 관중이 몰렸다니까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애당초 ‘공트럴’이건 ‘연트럴’이건 오리지널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그래도 센트럴 파크를 뉴요커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뉴욕의 허파’란 말이 결코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마천루 한복판에서 나무, 숲, 잔디, 호수 등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녹색의 자연’이야말로 센트럴 파크가 주는 휴식과 영감의 원천 아닐까.

‘공트럴 파크’에는 녹색의 공간이 부족하다. 앙증맞은 인공 폭포도 있고 정성껏 그려 넣은 벽화들도 쉽게 마주치지만 모름지기 공원의 생명은 녹색에서 비롯되는 것 아닌가. 원자력병원의 애물단지 비오톱을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지역주민들까지 즐길 수 있는 푸르고 예쁜 공원으로 만들어 바로 옆 ‘공트럴 파크’의 명성까지 끌어올리는 데 일조하고 싶어지는 이유다. 우리 비오톱을 생명력 넘치는, ‘공릉동의 허파’ 같은 공원으로 개조할 수 있다면 적어도 그동안 병원 마당을 콘크리트 건물과 바꿀 때마다 느꼈던 딜레마가 재발될 것 같진 않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