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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 손은 약손, 손주 배는 똥배
할매 손은 약손, 손주 배는 똥배
  • 전성훈
  • 승인 2021.06.22 13:2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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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25)

누구나 어렸을 적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성인이 된 후에도 3, 4세 때의 일들을 기억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중 일부는 정말로 기억력이 탁월한 사람이지만, 그 대부분은 ‘이식된’ 기억, 즉 성장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이 말해준 내용을 자신의 기억으로 인식하는 가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유년기 기억상실(infantile amnesia)은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거의 예외 없이 발생하는 현상이다. 2005년의 연구에 따르면 3세 때의 일을 7세에는 64% 이상 기억하지만, 8세에는 36% 정도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또한 성인에 대한 실험에서도 가장 어린 시기의 기억은 평균 3.67세였고, 20대나 70대나 큰 차이가 없었다. 즉 8세 이후가 되면 유년기 기억을 거의 잊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유년기 기억상실의 이유에 대한 최근의 유력한 가설은,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인 뇌 해마의 뉴런이 일정 시기가 되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새 뉴런으로 바뀌고, 뉴런간 연결체인 시냅스도 바뀌면서 기억이 ‘초기화’된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초등학교 입학 전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맏딸인 어머니가 일하셨기에, 필자가 태어남으로써 49세에 할머니가 되신 외할머니와 여러 이모들이 필자를 많은 사랑으로 돌봐주셨다는 기억 정도이다. 하지만 가장 선명한 기억은, ‘친할머니의 손’이다. 방학 때마다 시골에 내려간 필자를 친할머니께서는 끔찍이 아껴주셨는데, 필자가 배탈이 나서 배가 아플 때마다 친할머니께서는 ‘할매 손은 약손, 손주 배는 똥배’라는 묘한 곡조(?)를 읊으면서 필자의 배를 쓸어 주셨고, 그러면 신기하게 아픈 배가 나았다.

시골 읍내에 병의원은 고사하고 약국도 아닌 약방밖에 없던 시절, 한밤의 복통을 겪던 유년의 필자에게 고된 농사일로 항상 거칠었던 친할머니의 손과 약간 쉰 목소리는 신(神)의 그것이었다. 필자는 친할머니의 손이 필자의 배를 쓰다듬던 그 촉감을, 귓가의 그 흥얼대는 듯한 목소리를 기억한다. 이것이 이식된 기억일 수 없는 이유는, 누구도 필자에게 그 촉감을 느끼게 해주거나 그 곡조를 들려줄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를 치유했던 할머니의 손처럼, 사람의 손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신체 말단의 일부일 뿐이지만, 사람은 손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타인에게 감정과 그 이상의 것을 전할 수 있다. 남녀가 손을 맞잡음으로써 서로에 대한 애정을 전하고, 상대방과 악수함으로써 호의를 전하고, 적에 맞서 칼을 쥠으로써 분노와 의지를 전할 수도 있다. 의료인의 의술 역시 대부분 손을 통해 환자에게 전달된다. 물론 정신과 같은 경우도 있지만, 역시 대부분의 술기는 손을 통하지 않고서는 시행할 수 없다.

이렇듯 의료인의 손은 환자를 치료하는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수단이지만, 의료인의 손으로 이런 것을 한다면 이것을 환자를 치료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

① 한의사는 손으로 환자의 손날 부위를 두드리고, 환자는 ‘나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마음 속 깊이 진심으로 받아들입니다’를 3회 반복한다. ② 환자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계속 반복하고, 한의사는 정수리부터 손날 부위까지 13개 부위를 두드린다. ③ 한의사는 손으로 환자의 손등 부위를 두드리고, 환자는 눈을 감았다 떠서 동공을 우하방, 좌하방으로 움직인 후, 시계방향, 반시계방향으로 움직이고, 노래 1구절 가량을 흥얼거리고 ‘하나, 둘 셋...’이라고 숫자를 센 후 다시 노래를 흥얼거린다.

누가 보더라도 ‘지금 이게 뭐하는 거지?’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 의료인과 환자가 의료행위로서 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것은 ‘경혈 자극을 통한 감정자유기법’이라는 엄연한 한방의료행위이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은 2019년 이를 ‘신의료기술’로 평가했고, 보건복지부는 최근 급여·비급여 행위 목록에 이를 비급여 행위로 등재했다. 정부가 이를 의료행위로 공식 인정한 것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2015년 동일한 내용으로 신의료기술평가가 처음 신청되었을 때 NECA는 ‘근거 자료가 부실하다’, ‘유효성이 없다’며 최하위 D등급을 매기고 신의료기술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2018년 추가적인 과학적 근거 제시 없이 재신청되었음에도 이를 신의료기술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NECA는 이것의 유효성이 새로 생기거나 상대적으로 높아졌다고 본 것인데, 그러면 그 3년 사이에 우리나라 의학수준이 퇴보했다고 본 것인가?

더욱이 NECA는 “동일한 목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기술이 있는 경우에는 해당 기술과 비교하여 유효성이 동등하거나 우수한지를 검증합니다. 따라서 유효성은 현존하는 의료기술보다 우수하거나 동등한 치료효과가 있는 경우에만 유효성이 있다고 판단합니다.”라고 유효성 판단 기준을 스스로 공개하고 있다. 현재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치료하는, 유효성이 입증된 방법으로는 인지행동치료, 노출치료, 집단치료, 약물치료 등이 있다. 그렇다면 NECA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눈알을 굴리고 있는 환자의 신체를 손으로 두드리는 행위를 이러한 치료 방법과 동등하거나 보다 우수한 치료효과가 있다고 본 것인가?

무학의 촌로였던 필자의 할머니께서 과학을 알았을 리는 없다. 하지만 복통을 호소하는 손주의 배를 간절한 마음으로 쓰다듬는 할머니의 손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할 필요도 없는 신(神)의 영역에 가깝다. 그러나 국가가 의료행위로 인정하고 의료제도에 편입하여 국민들에게 진료비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는 의료인의 일정한 손동작은, 온전히 인간의 영역이다. 따라서 과학에 의해 증명되어야 하고, 비용을 치르는 국민들의 추정적인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필자는 의료인은 아니지만 상식인으로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눈알을 굴리고 있는 환자의 신체를 두드리는 한의사의 매끈한 손보다는, 졸음이 쏟아지는 눈을 비비면서 정성껏 손주의 배를 쓸어 주시던 할머니의 거친 손이 의학적 유효성이 더 클 것 같다. 받은 사랑을 다 못 돌려드린 것을 후회하는 못난 손자는, 납득할 수 없는 신의료기술을 접하게 되니 하늘나라에 계신 할머니께 왠지 죄송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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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pea 2021-06-22 16:18:16
신경정신의학회는 감정자유기법이 한의학자에 의해 진행한 연구가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로 지난 2014년 신경정신의학회 회원이 신의료기술평가위원회에 심의 신청한 '감정자유기법' 사례를 제시했다.

출처 : 의협신문(http://www.doctorsnews.co.kr)


개발하신분은 의사라고 합니다 변호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