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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姓)희롱 사절
성(姓)희롱 사절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06.15 1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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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준의 공릉역 2번 출구 〈19〉

 

오해가 없도록 먼저 내 경험부터 고백해야겠다. 외부기관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다 보면 종종 내가 앉을 자리에 주최 측이 명패를 미리 세팅해놓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회의 자리에 비치된 명패에 내 이름의 첫 글자가 ‘홍’이 아니라 ‘흥’으로 잘못 적힌 걸 발견했다. ‘홍’이 세로로 길쭉한 글자라 출력해놓고도 얼핏 ‘ㅗ‘와 ‘ㅡ’가 구분이 안 되어서 잡아내지 못한 실수였을 것이다. 왠지 좀 희롱당한 기분이 들었던 나는 회의 중 발언하는 과정에서 짐짓 언짢은 표정으로 여러 차례 ‘흥, 흥’하고 불필요한 추임새를 넣었다. 무심한 사회자는 끝까지 눈치를 못 채는 것 같았다. 아무튼 이런 종류의 ‘성(姓)’ 희롱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조선 초기의 문장가였던 서거정이 편찬한 수필집 <필원잡기>에 등장하는 썰렁한 이야기가 있다. 세조가 어느 날 영의정 신숙주와 우의정 구치관을 불러 술을 마시자고 했다. 우의정으로 막 발령받은 구치관을 축하한다는 명목이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세조는 자기가 부를 때 대답을 제대로 못 하면 벌주를 내리겠노라 하면서 ‘신 정승!’ 하고 외쳤다. 신숙주가 ‘네’ 하자 세조는 ‘이번에 새로 발령받은 신(新) 정승을 부른 건데’ 하면서 벌주를 받게 했다. 이후의 스토리는 짐작대로다. ‘구 정승!’ 하고 부를 때 구치관이 대답하면, 먼저 발령받은 ‘구(舊)’ 정승을 부른 것이라 하고, 그래서 신숙주가 대답하면 ‘구(具)’씨 성을 가진 구치관을 불렀다 하고, 억지를 쓰면서 부하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세조. 이거 직위를 이용한 ‘성(姓)희롱’ 아닌가.

진짜로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을까 염려되지만, 뭐 웬만한 국민이 다 아는 조크니 얘기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은 게 있다. IMF 시절 야구의 박찬호와 골프의 박세리는 암울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비춰주던 스포츠 영웅들이었다. 둘 다 글로벌 스타였기에 이름을 영문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같은 박(朴)씨 성을 박찬호는 ‘Park’로 박세리는 ‘Pak’로 썼다. 미국인들은 당연히 두 사람 성이 다른 것이라 생각했고 발음도 ‘찬호팍’, ‘세리팩’으로 다르게 했다. 유독 짓궂은 한국인들만이 영문 철자 ‘r’의 유무에 주목하면서 오늘날 진짜 성희롱 반열에 오른 농담을 탄생시켰다.

나 역시 인터내셔널하게 성(姓)희롱을 당한 적이 있다. 어느 해인가 샌디에이고에서 열렸던 학회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작은 학회였기 때문에 행사 진행요원들이 그리 전문적이지 못했다. 내가 자필로 써서 사전에 팩스로 보낸 참가지원서를 보고 명찰을 준비했을 텐데 아마 날려 쓴 ‘Hong’의 ‘H’를 ‘Li’로 잘못 읽었나 보다. 접수요원이 ‘Dr. Liong’이라 출력된 이름표를 내게 건네면서 상냥한 얼굴로 “웰컴, 닥터 리옹”하고 웃는다. 어디 프랑스에서 온 의사가 있나 하고 잠시 주위를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돌아와 병원에서 그 이야기를 하니까 우리 과 의사들은 한동안 나를 ‘리옹 선생’이라 놀렸다. 아마 ‘옹’이란 단어가 노인을 연상시켜서 그리들 더 즐거워했나 보다. 어쨌든 여선생들이 깔깔거리는 걸 보면서 기분이 좋지 않았으니 성(姓)희롱당한 게 맞긴 한 것 같다. 문득 파리에서 오래 공부했던 사촌 여동생 생각이 났다. ‘Hong’을 프랑스 사람들이 발음하면 ‘H’가 묵음이 되고 한국 사람들 귀에는 ‘옹구’로 들려 괴롭다고 했었다. 한번 ‘리옹’으로 불려보니 십여 년간 ‘마드모아젤 옹구’로 불린 여동생의 심정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후 나의 성(姓)희롱 에피소드를 들은 주변 사람들은 공감한다며 이런저런 자기 경험들을 보탰다.

미국 연수 시절 이웃에 살던 교수님 한 분은 성이 ‘손’씨였는데 영어로 ‘Son’으로 표기하는 게 문제였다. 여권을 보면 흔히 이름을 적는 난에 ‘아무개의 아내’라는 의미로 ‘w/o (wife of) 아무개’란 표시를 한다. 그때는 토트넘의 손흥민이 지금처럼 유명해지기 전이라 손 교수님 사모님의 여권에 적힌 ‘wife of Son’이란 문구를 보면서 아들과 엄마에게 묘한 눈길을 보내던 미국 공항 출입국 심사직원들의 표정이 그 사모님에겐 충분히 불쾌했을 법하다.

내 여동생의 친구 한 사람은 천주교에 귀의하여 세례명을 정할 때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녀로 잘 알려진 ‘클라라’란 이름을 받고 싶어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천주교에서는 ‘카톨릭’을 ‘가톨릭’이라 표기하는 것처럼 초성에 격음이 오는 것을 피하기에 ‘클라라’도 ‘글라라’로 쓴다. 성이 ‘주’씨였던 이분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주글라라’라 부르며 재밌어하는 걸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에 차마 그 세례명을 선택하지 못했다고 한다.

본론까지 이리저리 길게 둘러오긴 했지만 우리 원자력병원도 성(姓)희롱을 당한 적이 있다. 사람으로 친다면 원자력의 ‘원’자 정도가 성이 될 텐데 이걸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원자력’ 앞에 ‘탈(脫)’이나 ‘비(非)’자를 붙이라는 둥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한 번씩 던지곤 했다. 제일 황당했던 건 2018년 지자체 선거에서 서울시의원 후보로 공릉동에서 출마한 어떤 분이 ‘원자력병원 명칭 변경’을 당당히 공약으로 내걸었던 일이다. “‘원자력’이라는 이름이 혐오와 위험물이라는 인식으로 시대적으로 맞지 않다”라고 주장하면서 병원 바로 앞에 그 공약을 명시한 플래카드를 내걸기까지 했다.

독립하기 전 원자력병원의 모(母)기관은 현재 한국원자력연구원으로 이름이 바뀐 ‘원자력연구소’였다. 최초의 원자로가 옛 원자력연구소 자리인 우리 병원 바로 옆 한전연수원 부지에 있다. 이 나라 원자력 분야의 선구자들이 원자력, 곧 방사선의 의학적 이용을 위해 50여 년 전 야심 차게 만든 병원이 우리 원자력병원이다. 묵묵히 ‘방사선을 이용한 암 환자 치료’라는 국가적 소임을 다해 온 원자력병원이 만약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따라 이름을 바꿔야 한다면 그건 구성원들의 치열한 토론과 합의가 첫 번째 필수조건이다. 그래야만 맹자가 논한 ‘역성혁명(易姓革命)’ 수준의 혁신이 일어날 수 있다. 정치적 목적으로 주변 사람들이 툭툭 던지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성(姓)희롱은 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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