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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룡이
삼룡이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06.08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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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준의 공릉역 2번 출구 〈18〉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어릴 적 살던 집엔 작은 마당이 있었다. 할머니는 늘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우셨다. 죽거나 실종되거나 하면 금세 어디선가 또 다른 놈을 얻어오셨기에 유년 시절 내 기억 속에는 언제나 강아지가 등장한다. 그중 한 녀석의 이름이 ‘삼룡이’였다. 재기발랄한 요즘 청년들은 ‘시고르 자브종’이라고 마치 유럽 어디의 고급 혈통인 양 발음한다지만 그저 흔한 ‘시골 잡종’, 더 쉬운 말로는 ‘똥개’였을 뿐이다. ‘삼룡이’는 새끼 때 비척비척 걸음을 잘 못 걷는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당시 ‘비실이’로 불리던 코미디언 배삼룡의 이름에서 따온 거다. 참고로 우리 집안 어른들은 개 이름을 우리말로 붙이기를 선호하셨다. 사촌 형님네 개는 ‘춘향이’였는데 아마 지조를 지키라 해서 그랬던 것 같다. 일생 동안 새끼를 스무 마리 넘게 낳긴 했지만.

삼룡이가 커가면서 반전이 생겼다. 덩치가 말도 못 하게 커지면서 힘이 엄청나게 세진 것이다. 힘만 세진 게 아니라 성격도 난폭해져서 동네 개들을 혼내주는 것은 물론이고 수틀리면 가끔 주인한테도 덤볐다. 알고 보니 이 녀석은 똥개가 아니라 ‘도사견’이었다. 일본 시코쿠의 ‘도사(土佐)’라는 작은 시에서 아예 작심하고 투견으로 개량한 종자였던 거다. 어린 내가 삼룡이 목줄 끄는 것을 버거워하는 걸 보시고 위험성을 직감한 아버지는 당장에 삼룡이를 친구분이 운영하시던 경기도 광주의 어느 양계장으로 보내 버리셨다. 양계장에는 절도나 야생동물의 침입을 막기 위해 크고 사나운 개들을 여러 마리 기르는데 삼룡이의 용도는 딱 그곳이 적합했다. 후일담이지만 양계장의 기존 대장견을 물어 죽이고 삼룡이가 ‘짱’이 되는 데는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새삼 삼룡이를 떠올린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초등학교 친구 A 이야기를 해야겠다. 초등학교 때 날렵해서 축구를 유독 잘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A가 허리가 아프다고 어느 날 우리 병원을 불쑥 찾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옛친구가 반가웠지만 한 편으로 조금 조심스러웠다. 그가 신촌 일대에서 일찌감치 이름난 ‘조폭’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보다 덩치가 엄청 커진 녀석은 다행히 사람 좋아 보이는 어린 시절의 미소는 간직하고 있었다. 차 한잔하면서 A의 지난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건 무슨 조폭 영화 몇 개를 합성해서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당연히 미화와 과장이 많이 들어갔겠지만 침 튀기며 격투 장면을 묘사하는 A의 현란한 말솜씨에 빨려들고 말았다.

어쨌든 일단 통증클리닉으로 A를 데려가서 아프다는 허리에 ‘신경차단술’을 받도록 했다. 등에 시술하려던 마취과의 원로 선생님은 꽤 놀라셨던 것 같다. 등짝에 커다란 용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으니 마취 주사 찌르다가 혹시 용 비늘이라도 손상될까 신경이 쓰이셨을지도 모르겠다. 녀석은 시술받고 나서 며칠 동안 신경외과에 입원을 했는데 잠시 문병하러 갔더니 병실에 ‘아는 동생’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90도 인사를 그때 처음 받아봤다.

치료에 만족감을 느낀 A는 얼마 후 비슷한 증상을 겪는 친구를 한 명 데리고 왔다. 나한테는 ‘이태원 쪽에서 사업하시는 분’이라고 소개를 했다. 이번에도 통증클리닉에 가서 시술을 받도록 했다. 간호사의 전언에 따르면 이태원 쪽에 계시다는 그분의 등도 용 문신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마취과 선생님은 또 놀라셨을 것이고 내가 어디서 자꾸 이런 분들을 모시고 오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셨을 것 같다. 그때 이 이야길 전해 들은 고교 후배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용 두 마리가 떴으니 ‘쌍용’이네요. 한 분 더 오시면 ‘삼룡이’ 되겠는데요.”

스테디셀러인 양귀자의 소설 <모순>에는 장차 조직의 보스를 꿈꾸는 주인공 남동생에 대한 인상적인 묘사가 나온다. 말론 브란도의 <대부>와 최민수의 <모래시계> 비디오테이프를 줄담배를 피우며 눈이 빠지도록 매일 밤 보고 또 보는 동생. 최민수처럼 목소리 낮게 까는 연습을 반복하는 그에게 그 비디오들은 조폭이 되기 위한 교과서였다.

사춘기를 지나가는 남학생들 중 ‘힘’과 ‘폭력’에 대한 동경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게 공공연히 드러내기는 어려운 욕망이니 마피아나 조폭 영화 같은 대체재를 찾는 것 아닐까. 이소룡을 흠모하며 쌍절곤을 연마한 뒤 마침내 상대방을 흠씬 두들겨 패는 ‘말죽거리 잔혹사’의 권상우에게 열렬히 공감할 때 난 우리 마음속 깊이 ‘잔혹한’ 폭력 성향이 숨겨져 있다는 걸 섬찟하게 느꼈다. 오래전 의과대학을 퇴임하신 잘 아는 교수님 한 분이 요즘 종합격투기 시청에 푹 빠져서 지내시는 걸 보면 남자들의 이런 갈망에는 나이 제한이 없는 것 같다.

일전에 병실에서 근무하는 간호사가 환자 보호자에게 머리채를 잡히는 봉변을 당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자기 어머니인 환자를 잘 돌봐주지 않는다면서 간호사를 폭행한 그 보호자는 간호사 스테이션에까지 와서 소리를 지르며 기물을 부수었다. 경찰이 출동했고 지금 소송이 진행 중이다. 우리 응급실에는 통증이 심하다며 수시로 찾아와 마약성 진통제를 요구하는 환자가 있었다. 어느 날 자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커터칼을 꺼내 들고 난동을 부렸다. 체포되어 결국 징역형을 받게 되었지만 그때까지 의료진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최근엔 과거 치료 결과에 불만을 품은 어떤 환자가 자기를 수술했던 의사의 외래 시간에 맞추어 병원에 나타난다. 의사 들으라고 대기실에서 큰소리로 욕을 해댄다. 명백한 업무방해지만 그 정도만으로 경찰은 특별한 조치를 취하기 어렵다며 양해해 달라고 한다.

위압적인 용 문신을 뽐내며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신속하게 일을 해결하는 ‘쌍용’ 두 분의 힘을 좀 빌리고 거기에 추가하여 완전체 ‘삼룡이’를 만들 세 번째 사람은 내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간절해지는 이유다. 양계장을 단숨에 제압해버린 우리 옛 강아지 ‘삼룡이’도 그래서 자꾸 생각이 나는 거다. 이참에 문신 스티커나 사서 붙여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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