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마케팅
향기 마케팅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05.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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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16〉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작가 김훈이 2019년에 펴낸 산문집 <연필로 쓰기>에는 ‘밥과 똥’이란 제목의 에세이가 있다. 내용 중에 ‘똥’이란 단어가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 호기심에 형광펜으로 칠해가며 한번 정확히 세어 보았더니 무려 261회다. 글의 전체 분량이 28쪽이니 한 페이지에 평균 9.3회의 ‘똥’이 등장하는 셈이다. 이것도 물론 ‘대변’이나 ‘분뇨’ 같은 유의어는 제외한 숫자다.

김훈 특유의 장중한 문장으로 똥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에 마치 일생을 똥 연구에 매진한 사람이 그간의 수고를 집대성하여 최후의 강의를 하는 것 같은 경건함마저 글에 감돈다. 푸른 똥, 붉은 똥, 노란 똥 등등 똥의 색깔로 질병을 진단하는 ‘동의보감’ 이야기가 나오고, 대나무 통에 똥물을 넣고 피스톤으로 전방에 분사하는 다산 정약용의 전쟁무기도 소개된다. 심지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를 떠돌 때 하나님이 똥을 어떻게 누어야 하는지 가르쳐주시는 성서의 한 장면도 등장한다(신명기 23장 12, 13절).

짧은 산문을 읽으면서 이렇게까지 몸을 여러 차례 떨어본 적이 또 있을까 싶다. 동서고금의 똥 이야기가 흥미롭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작가가 묘사하는 똥의 형태와 질감이 너무나도 사실적이고 구체적이어서 어쩔 수 없이 그와 연결된 온갖 냄새들을 끌고 오기 때문이다. 주체할 길 없는 식욕에 번번이 다이어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분들께 일독을 권한다.

악취 제거를 위해 인류가 개발한 게 ‘향수’다. 향수의 본고장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남부도시 ‘그라스(Grasse)’는 애초에 가죽 산업이 번창한 곳이었고 가죽에서 나는 지독한 냄새를 없애려다 보니 향수 산업이 덩달아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김훈의 글에서 배어나는 똥냄새를 잠재우기 위해 화장실용 방향제며, 디퓨저, 그리고 양키 캔들 같은 걸 잇달아 열심히 상상해야 했다. 그렇게 정신적으로 ‘악취’와 ‘향기’를 오락가락 하다보면 문득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기괴한 소설 <향수>가 떠오른다.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는 18세기 파리의 비린내 가득한 생선시장에서 태어났다. 초인적인 후각의 소유자였던 그는 여인들의 체취를 향수로 담아내기 위해 연쇄살인까지 불사하는 악마와 같은 인물로 성장한다. 그라스에서 습득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여성들의 시신에서 향기를 뽑아내는 그루누이. 마침내 그것들을 한데 모아 뭇사람들을 환각에 빠지도록 하는 ‘궁극의 향수’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이 이야기는 음습하고 난해한 부분이 제법 있지만 어쨌든 읽고 나면 지금까지 놓치고 있었던 우리 주변의 냄새들과 나의 후각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것만은 분명하다.

가만 생각해보니 난 서점에서 풍기는 책 냄새를 매우 좋아했다. 시간 날 때마다 광화문의 대형서점을 찾게 된 데에는 그곳 책에서 풍기는 은은한 내음이 한몫한다고 믿게 됐을 즈음 그 냄새가 인위적으로 만든 향수에서 기인했음을 알게 됐다. 서점에서 자신들의 ‘시그너처 향’이라며 ‘책의 향(The Scent of Page)’이라 이름 붙인 향수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속았다는 배신감도 잠시, 맡을수록 유칼립투스와 편백나무 향을 기반으로 만들었다는 그 향수가 마음에 들었다. 왠지 집중해서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줄 것 같고 자꾸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게 해줄 것 같은 기대감에 디퓨저 몇 개를 사서 병원 곳곳에 두었다.

이렇게 특정 향과 브랜드를 연관시켜 제품이나 기업 이미지를 강렬하게 만드는 감각 마케팅을 ‘향기 마케팅’이라 일컫는 걸 알았다. 고급 의류매장이나 호텔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도입한 방법이라는데 알고 보니 어느새 병원가에도 들어와 있었다. 아직은 주로 개인병원들 위주지만 향기 마케팅 전문 업체들이 현장에 직접 와서 기존 환경을 체크한 다음, 주로 방문하는 환자층에게 어필할 수 있는 최적의 향기와 그 농도 그리고 인테리어까지 두루두루 처방해 준다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 병원은 어떤 향이 어울릴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났다. 지금 상태에서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외래와 병실을 다닐 때마다 킁킁거려 보기도 했다. 병원에서 소독약 냄새가 난다는 건 한참 옛말이고 한때는 로비에 은근하게 퍼지는 커피향이 세련된 병원의 상징처럼 여겨진 적도 있지만 그것도 다 흘러간 이야기라 임팩트가 없다. 병원 여기저기 다녀 봐도 병동 식사 때 ‘밥차’에서 풍기는 밥냄새 말고는 뭐 특별한 건 없는 듯한데...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여기에 어떤 향기를 입히면 좋을까.

지금은 퇴사했지만 오래 전에 교환실에서 근무했던 직원 한 분은 부리부리한 눈 화장과 함께 엄청난 농도의 향수를 뿌리는 걸로 유명했다. 구석구석까지 그분의 동선을 전 직원이 다 알 수 있는 정도였으니까. 옛 추억에 미소 짓다가 그렇게 인위적인 향수가 아니라 나를 포함하여 직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선 어떤 체취가 묻어날까 하는 데에 생각이 멈췄다.

주말마다 산으로 들로 다니며 버섯을 캐고 나물을 뜯어와 병원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전 홍보팀장에게서는 풋풋한 흙냄새, 풀냄새가 난다. 매사 깐깐하게 체크를 하지만 병원 일이라면 늘 열정적으로 솔선수범하는 자산장비팀장에게선 온돌 데우는 장작불의 냄새가 나는 듯하다. 수줍음은 좀 타지만 환자 말을 경청해주는 것으로 유명한 우리 정신과 과장에게서는 인사동 전통찻집의 그윽한 차향이 풍겨나는 것 같다. 성격유형 검사를 응용했다는 인터넷 상의 ‘퍼스날 스멜’ 설문 테스트를 재미삼아 해 본 결과, 내게서는 ‘건조기에서 막 꺼낸 수건 냄새’가 나는 것으로 나왔다.

어쨌거나 우리 병원에 덧입히고 싶은 향기는 이렇게 ‘사람 내음’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그루누이처럼 기괴하고 파괴적인 방법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개성 넘치는 직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체취를 차곡차곡 모아 갈 수 있다면 마침내 ‘궁극의 절대 향수’를 제조하는 게 현실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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