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반부패’ 병원의 조건
‘청렴·반부패’ 병원의 조건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05.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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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15〉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과거에 학교 급훈으로 단연 인기였던 단어는 ‘근면, 성실’이었다. 거꾸로 생각하면 게으르고 불성실한 학생들이 오죽 많았으면 곳곳에서 이런 구호를 외쳤을까 싶다. 마찬가지로 오랜 전통의 서울 한 사립고 교훈에 ‘청결’이란 덕목이 아직도 들어있는 걸 볼 때마다 난 말쑥하고 깔끔한 그 학교 아이들을 떠올리기보다는 오히려 반대의 상상을 한다. 어떤 집단이 유독 강조하는 가치가 있다면 그게 잘 지켜지지 않아서 더욱 유난을 떠는 것 아닐까 생각될 때가 종종 있는 법이다. 마치 옛날 제5공화국이 ‘정의 사회’를 그토록 부르짖었던 것처럼.

우리 기관의 행정부장은 요즘 ‘청렴, 반부패’ 활동을 위한 아이디어 수집에 여념이 없다. 공공기관들은 매년 국민권익위원회로부터 청렴도 평가를 받고 성적이 언론에 공개되기 때문에 이런 활동들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청렴한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여러 사람이 위로부터 하도 스트레스를 받으니 옛날 급훈이나 교훈 생각이 나서 좀 씁쓸할 때도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공공기관들이 청렴해지려고 이렇게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며 애를 쓰는데 과연 그 결과는 만족스러울까? 우선 정곡을 찌르는 <채근담>의 한 구절부터 기억했으면 좋겠다.

“참으로 청렴함에는 청렴하다는 이름조차 없으니 그런 이름을 얻으려는 것부터가 바로 그 이름만을 탐욕함이다.”

아쉽게도 청렴 문화의 정착은 오로지 개인의 각성과 자발적 노력만으로는 기대하기 어렵기에 부득이 사회적 압력이나 감사 활동 같은 강제적 조치들이 동반된다. ‘반부패 선언’이나 ‘공직기강 확립’ 같이 권위적인 표현들이 이때 등장한다. 하지만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는 반부패 활동이 어떤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는지 우리 병원 사례를 하나 살펴보자.

그 선물이 하필 상하기 쉬운 ‘곱창’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간호사들 말에 따르면 퇴원한 환자의 보호자가 감사의 뜻으로 그걸 대략 2인분쯤 가져다주었단다. 신선도가 생명인 곱창은 냉동이건 냉장이건 오래 보관할 수 없는 음식이기에 급히 ‘처분일’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병원 모(某) 진료과의 간호사, 의료기사 등 4인은 그렇게 퇴근 시간 이후 외래 진료실 빈방에서 곱창 파티를 하기로 ‘모의’했다. 조리에 필요한 전열기는 입원 환자로부터 잠시 압수해 놓았던 걸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라면을 끓여 먹을 때처럼 너그럽지 않았다. 적당히 넘어가기엔 곱창 굽는 연기가 많이 났고 그 때문에 ‘사건’의 현장은 저녁 순찰 중이던 보안팀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2018년 늦가을에 있었던 이 일은 엄중하게 주의를 한번 받고 당사자들이 반성하는 선에서 끝이 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공직기강 확립’의 압박 때문이었을까. 누군가 이 사안을 그 정도로 끝내선 안 된다고 감사부서에 제보했다. 감사실은 거의 1년이 다 되어갈 즈음 ‘진료실에서 곱창을 무단으로 취식한 사건’에 대해 수개월 동안 조사했고 마침내 관련자들에 대한 징계처분 요구에까지 이르렀다. 징계 대상에는 얼떨결에 불려와 곱창 몇 점을 얻어먹은 레지던트 2명과 일차 보고를 받고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상급자 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열기를 사용한 무단 취식이 안전관리 규정을 위반했고 환자 보호자로부터 곱창을 사례로 받은 것은 직원행동강령을 위반했으며, 보고를 받고도 구두 질책만으로 끝낸 상급자의 일 처리방식도 미흡했다고 지적한 감사실 의견은 물론 타당하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사건을 가차 없이 ‘일벌백계’함으로써 우리 병원이 더욱 청렴해지고 부패가 사라질까 하는 의문을 가질 즈음 설상가상의 일이 발생했다.

공공기관은 의무적으로 인터넷에 경영공시를 해야 하며 공시 내용에는 감사보고서도 포함된다. 언론사 기자들 가운데는 종종 감사보고서에 흥미있는 기삿거리가 등장하기에 이것만 매일 모니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기자들에 의해 ‘사건’ 발생 1년 2개월 만에 올라온 우리 기관의 ‘곱창 취식’ 감사보고서는 단신이지만 순식간에 여기저기에 기사화되기 시작했다. 언론이 주목한 건 어쩌면 사안의 중요성 여부가 아니라 ‘곱창’이라는 다소 의외의 먹거리가 ‘촌지(寸志)’로 주어졌다는 것 같았다. 만약 등심이나 삼겹살이었어도 이 정도로 떠들었을까 궁금하다. 급기야 인터넷 신문도 아닌, 버젓이 종이 신문까지 발간하는 전통 있는 한 언론사에서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 ‘초음파 검사실에서 곱창 구워 먹은 엽기의사’

1년 2개월 전, 지나가다 곱창 한 점 얻어먹은 걸로 졸지에 ‘엽기의사’ 타이틀을 얻게 된 레지던트들은 그 기사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재수 없게 걸렸네’라고 본인의 불운에 대한 한탄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라는 처분 요구의 ‘불공정함’에 대한 분노가 뒤섞이지 않았을까. 적어도 ‘이제 더 청렴하게 살아야지’ 하는 다짐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썩기 쉬운 곱창을 빨리 먹어 없앤 게 오히려 진정한 반부패 활동 아닌가’라는 누군가의 빈정거림은 여차하면 청렴 캠페인이 희화화될 것 같은 염려마저 자아낸다.

청렴하고 부패하지 않는 병원을 만드는 데는 개개인의 의지와 실천이 필수 조건이다. 청렴과 끝말잇기로 이어지는 단어인 ‘염치(廉恥)’를 기억하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본인의 흠결이 노출되면 언제나 모든 게 운이 없는 탓이고 남들은 훨씬 더 하지 않느냐고 씩씩거리는 사람들이 30% 아래로 줄어들어야 한다. 배움과 각성을 통해 염치를 알고 부패의 유혹에 대한 항체가 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서 직장과 사회가 ‘집단면역’ 수준에 도달하는 것만이 청렴 국가를 이루는 유효한 방법 아닐까. ‘왜 나만 가지고 그래’가 통하지 않아야 한다.

아울러 본질과 동떨어진 ‘망신 주기’식 공직기강 확립은 당하는 개인에게 바람직한 깨달음을 줄 수 없다. ‘계도’는 실적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깨달음을 주어 바르게 이끌기 위함이다. 곱창 얻어먹은 레지던트들이 비록 사려 깊지는 못했지만 ‘엽기의사’로까지 매도당한 것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 되지 않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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