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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검사의학과 의사를 위한 변명
진단검사의학과 의사를 위한 변명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05.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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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14〉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외과 의사 다이몬 미치코는 복부 장기는 물론이고 심장과 폐, 뇌와 척추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외과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신기에 가까운 수술 솜씨를 발휘한다. 이력서에 취미도 수술, 특기도 수술이라 적는 게 괜한 소리가 아니다. 심지어 경마장에서 부상을 입은 경주마의 다리마저 거뜬히 수술해 내는 걸 보면 수의사 면허도 있는 것 같다. 2012년부터 2019년까지 매 시즌 20% 이상의 시청률을 자랑하던 일본의 의학 드라마 <닥터-X>의 주인공 이야기다. 고난도의 수술을 마칠 때마다 그녀가 내뱉는 대사, “와타시, 싯파이(失敗) 시나이노데(나는 실패하지 않아)”는 일약 유행어가 됐다.

일본에 ‘닥터-X’가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낭만닥터 김사부’가 있다. 김사부 역시 국내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트리플 보드’의 소유자로 일반외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이렇게 총 3개의 전문의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천재적인 수술 실력을 갖추고 있지만 다이몬 미치코와는 결이 좀 다르다. 완벽한 다이몬이 ‘슈퍼맨’에 가깝다면 어딘가 그늘이 있는 김사부는 ‘배트맨’을 연상시킨다고 할까. 아무튼 그가 던지는 대사는 철학적이다. “일하는 방법만 알고 일하는 의미를 모르면 그게 의사로서 무슨 가치가 있겠냐.”

예를 더 들 것도 없이 의학 드라마 속 멋진 주인공들은 죄다 외과 계열의 의사다. 피가 솟구치고 심장이 멎고 어마어마한 장기이식이 시도되는 수술실 상황이 반드시 등장해야 시청자들 눈길을 사로잡으리라고 제작진이 판단하는 거다. 드라마에 그토록 많이 나오니 사람들은 정형외과와 성형외과 구분 정도가 조금 혼동될 뿐 대부분의 외과 의사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 안다고 생각한다. 걸핏하면 “진단검사의학과 의사들은 무슨 일을 하세요?”란 질문을 받는 내겐 다소 부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언젠가 한 고등학생이 또 그 질문을 하길래 최선을 다해 답변해주려고 하는 순간, 학생의 어머니가 “얘야, 이 선생님 하시는 일은 하우스 박사가 하는 거랑 비슷하단다”라고 아는 체를 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가만히 나도 설명을 들어봤더니 이 어머니가 당시 인기 있던 미국 의학 드라마 <하우스(House M.D.)>의 열혈 시청자였다. 대학병원 ‘진단의학과(Department of Diagnostics)’의 과장인 주인공 ‘그레고리 하우스’ 박사가 하는 일을 내가 하는 일로 지레짐작한 거다. ‘하우스’ 이름을 그날 처음 들은 나는 ‘오호, 드디어 우리 과 이야기도 TV 드라마로 나왔구나’ 하는 반가움에 얼른 그걸 챙겨 보게 됐다.

아쉽게도 드라마 내용은 기대에 어긋났다. 정체불명의 괴질을 앓는 환자들에게 혈액 검사, 영상의학 검사 등 온갖 테크놀로지와 최신 의학지식을 총동원해서 기어이 진단을 내리는 하우스 박사. 희귀질환에 대한 그의 정확한 진단은 성공적인 치료로 이어져 환자의 생명을 구하고 시청자들은 환호한다. 하지만 이런 류의 전문과목은 국내에는 확실히 없거니와 미국에도 정식으로 존재할 것 같지 않다. 드라마 역시 하우스 박사의 본래 전공을 ‘신장학(nephrology)’과 ‘감염병’으로 소개하지 않는가. 작은 단서들을 통해 범인을 밝히는 ‘셜록 홈즈’식 추리물과 비슷한 구성을 하려다 보니 ‘진단의학과’라는, 일종의 탐정 사무소가 필요했나 보다. 어쨌거나 우리의 ‘진단검사의학과’는 하우스 박사의 ‘진단의학과’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TV 프로는 아니지만 대중소설 중에는 진단검사의학과, 약칭 ‘진검(診檢)과’ 의사들이 여러 명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이 실제로 있었다. 김향숙 작가가 1988년 발표한 중편소설 <수레바퀴 속에서>가 그것으로, 한 대형병원 진단검사의학과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검사실의 새 장비 도입을 둘러싼 알력, 병원 내 노사 갈등, 진검과 선후배 의사들 간의 경쟁과 협력 등이 실감 나게 다뤄진다. 소설 속 ‘디테일’이 너무도 생생한 이유는 작가의 남편이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였기 때문이다. 나는 재미있게 읽었지만, 이 소설의 흠이라면 일반인들에게는 대단히 심심하고 지루할 것이란 점이다. 소설답게 극적인 사건이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 당연히 이 줄거리로 영화나 드라마 제작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니 ‘슈퍼히어로’ 진검과 의사의 탄생은 언감생심일 수밖에.

진검과 의사들은 현미경 속 작은 세포나 세균 들여다볼 때를 제외하고는 근무시간 대부분을 숫자와 씨름하며 보낸다. 요즘은 유전자 검사의 발달로 ATGC 같은 암호의 해독도 주요 업무에 추가됐다. 얼핏 따분해 보이지만 이 일들이 어떻게 슈퍼맨이 크립토나이트 방사능을 피해 지구를 구할 수 있는지, 어떻게 배트맨이 첨단 장비를 사용해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지, 그런저런 비밀들을 알려주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면 제법 흥미진진하다. 최근에 타액에서 코로나19 진단을 30초 만에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어떤 반도체 기술을 우리가 평가한 결과 임상 적용은 시기상조라고 결론 내린 것은, 자칫 어벤져스에게 불량무기가 공급될 뻔한 비극을 막은 사례다. 이 정도면 뭐 TV에 주인공으로 얼굴 내밀지 않아도 꽤 보람 있지 않겠는가.

헤르만 헤세가 쓴 <수레바퀴 아래서>의 ‘수레바퀴’는 삶의 험난함과 억압을 의미하지만, <수레바퀴 속에서>의 그것은 진단검사의학과를 둘러싼 복잡한 인간관계를 상징한다. 김향숙 작가가 세밀하게 묘사했듯이 동료 의사, 의료기사, 행정직원, 기기 회사 등등 환자 말고도 진검과와 바큇살로 맞닿아 있어 나란히 굴러가야 하는 여러 ‘관계’들은 이 과를 전공하는 자들의 시각과 태도가 기업 CEO를 닮아야 함을 알려준다. 현미경, 숫자, 암호에 둘러싸인 ‘마이크로’ 세계만으로 진검과 의사의 전문성을 다 충족시킬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병원을 휘젓고 다닌 환자가 뒤늦게 코로나 감염이 의심되어 검사를 받게 됐을 때, 우리 과 선생들은 반응 커브 해석을 위해 급히 PCR 장비 앞에 모였다. 양성이면 병동을 폐쇄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기도하자고 내가 슬쩍 제안했더니 ‘기도’가 응답받으려면 ‘기부’를 같이해야 한다고 누군가 즉각 받아친다. 팽팽한 긴장을 풀어주는 진검과 의사의 센스요, 여유다. 결국 난 그 선생이 후원하는 유기견 보호협회에 돈을 보냈고 코로나 결과는 음성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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