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간병인의 슬픔과 웃음
어느 간병인의 슬픔과 웃음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04.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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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13〉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얼마 전 ‘슬픈 이야기를 웃기게 쓰는 법’이란 제목의 한 일간지 칼럼을 인상 깊게 읽었다. 극작가이며 연출가인 오세혁이 대학에서 진행하고 있는 자신의 글쓰기 수업을 소개한 것이다. 수업 중에 그가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건 먼저 각자 인생의 가장 슬펐던 순간을 떠올린 다음 그걸 어떻게든 웃긴 이야기로 바꿔서 A4 한 장에 써내라는 거다. 당황해하는 학생들에게 예시 삼아 오세혁은 자기의 스토리를 먼저 들려준다.

중학생 시절 뭔가 잘못을 저지른 오세혁은 자기 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일찌감치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술에 취해 한밤중에 들어온 아버지는 거실에서 아들을 때려줘야겠다고 중얼거리시다가 마침내 방에 들어오셔서 그의 발을 집으셨다. 눈을 꼭 감고 있던 오세혁이 드디어 이제 얻어맞는구나 싶어 발에 온 에너지를 집중하려는 찰나, 아버지는 처음으로 아들의 발이 평발임을 발견했다. 갑자기 요리조리 살피며 ‘연구 모드’에 돌입하신 아버지. 그러다가 심지어 발을 막 간지럽히기까지 하셨다고. 발을 간지럼 태우니까 ‘웃기는 이야기’는 맞는데 그럼 슬픔은 어디에 있을까.

그의 추억은 이렇게 이어진다. “아버지는 한참 동안 제 발을 간지럽히다가, 갑자기 발을 껴안고 우셨어요.” 당시 그는 사정상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었고 집에는 전기가 끊긴 지 오래라 밤마다 촛불을 켜놓고 있었단다. 남들 다 누리는 최소한의 편의조차 자식에게 제공하지 못하니 그 촛불이 미안해서 아버지가 우신 거란다. 글의 문맥으로 보건대 이후로 오세혁은 중학생 시절의 ‘촛불’로 상징되는 슬픔이 그의 앞에 다시 찾아올 때면 아버지의 ‘간지럼’을 떠올렸을 테고, 미소와 함께 그 고단한 환경들을 잘 극복해 갔으리라 짐작된다.

칼럼에 등장한 ‘인생의 가장 슬펐던 순간’과 ‘아버지의 울음’이란 문구들은 자연스럽게 작년 여름에 우리 병원에 입원하셨던 내 아버지를 생각나게 했다. 아버지는 말초신경을 감싸고 있는 ‘수초(myelin)’가 떨어져 나가면서 여러 신경계 증상이 동반되는 희귀질환을 오래 앓으셨다. 뾰족한 치료법은 없었지만 하지 마비가 진행되면서 통증이 너무도 심해졌기에 부득이 병원에 모실 수밖에 없었다.

입원 후 부딪힌 첫 난관은 정맥 확보였다. 수액과 면역억제제 주사를 위한 혈관 찾기가 쉽지 않았다. 몇 차례 간호사들이 실패하자 구원투수로 우리 소아청소년과 과장이 나섰다. 혈관이 만져지지도 보이지도 않는 갓난아기에게까지 자유자재로 주삿바늘을 꽂는다는, 자타공인 ‘정맥주사의 달인’이 팔을 걷어붙였으니 안심이 됐다. 그런데 한참 동안 신중하게 혈관을 찾던 그가 아버지 팔뚝에 네임펜으로 표식을 하고 바늘을 막 찌르려는 순간, 갑자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안경을 벗어 이마 위로 걸친다.

아아, 주사 달인의 명성은 옛날이야기였다. 자신에게도 어느새 심한 노안(老眼)이 찾아온 걸 잊고 있었나 보다. 제대로 끼고서는 도저히 초점을 맞출 수 없었기에 그는 안경을 머리 위로 급히 젖혀 놓고 눈까지 찌푸리며 혈관을 다시 더듬거려야 했다. 이 상황은 그에 대한 좀전의 신뢰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신기하게도 아버지 병환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던 나는 노안으로 버벅거리는 우리 소아과 선생의 모습에 잠시 웃을 수 있었다. 자신 있게 달려왔다가 안경까지 벗고 식은땀 뻘뻘 흘리며 난감해하는 그 표정이 얼마나 딱하던지.

아버지 상태가 점차 나빠지면서 입원 기간 또한 길어졌기에 나는 자청해서 간병인 역할을 떠맡았다. 코로나 사태로 환자 면회가 전면 금지되고 가족들이 서로 돌아가며 간병하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마침 직장 회식이나 일과 후 회의가 싹 없어진 까닭에 저녁에 내가 병상을 지키는 게 가능했다. 낮에는 병원 일을 하다가 저녁 식사 이후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는 아버지 곁에 있다 보니 행정 서류와 각종 책자들이 점점 병실에 쌓여 갔다. 그렇게 병원에 기거하며 토요일 오전에만 빨랫감 싸 들고 잠깐 집에 다녀오는 생활이 지루한 장마철 내내 이어졌다.

간병한다고 밤마다 병원장이 병실에 버티고 있으니 한동안 간호사들이 많이 불편해했다. 특히 신규 간호사들은 심야에 ‘바이탈’을 체크할 때 행여 내가 잠에서 깰까 살금살금 들어와서 최대한 조용하게 아버지의 상태를 측정한 뒤 후다닥 나가곤 했다. 그러다 가끔 체온계를 두고 가기도 했다. 원래 난 늦게까지 밤잠을 잘 못 이루는 체질이지만 부담 주지 않으려고 간호사들이 들어올 때 깊이 잠든 척하는 경우가 있었다. 살짝 뜬 실눈으로 긴장한 신규 간호사들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들어오면 눈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깨문 적도 있다. 아버지의 병환으로 슬펐던 와중에 슬며시 내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던 두 번째 기억이다.

아버지는 진균성 패혈증 증상이 나타나면서 의식을 잃으셨고 입원 두 달 반 만에 마침내 세상을 떠나셨다. 혼수에 빠지시기 직전 갑자기 “허허허” 하고 크게 헛웃음을 터뜨리시더니 한줄기 눈물을 흘리시던 아버지.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귓가에 또렷하다. “나 이제 간다.” 어디 가시냐는 간병인 아들의 질문에 “하, 늘, 나, 라”라고 느리지만 분명한 발음으로 대답하셨다. 그게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삶을 마감하는 시간, 비록 눈가는 조금 젖으셨지만 입으로는 크게 소리 내어 웃으셨던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 생각하니 슬픔에 빠진 가족들을 당신의 웃음으로 위로하시려 했던 속 깊은 배려 아니었나 싶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우리 삶에는 언제나 슬픔과 웃음이 뒤섞인다. 슬픔이 너무 아프지 않으려면 그것과 연결된 웃음을 떠올리는 게 제법 괜찮은 방법 같다. 오세혁이 ‘슬픈 촛불’ 앞에서 ‘아버지의 간지럼’을 생각했듯이 나 역시 아버지와의 ‘슬픈 이별’로 힘들 때마다 소아과 선생의 ‘노안’과 신규 간호사들의 ‘허둥지둥’, 그리고 아버지의 ‘헛웃음’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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