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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선거와 한국 의협회장 선거
미국 대통령 선거와 한국 의협회장 선거
  • 전성훈
  • 승인 2021.03.30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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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15)
전 성 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앨 고어를 아실 것이다. 4대 100년간 내려오는 미국 동부의 정치명문가 출신으로,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후 월남전에 종군했고, 가문의 정치기반을 이어받아 테네시 주에서 연방하원의원을 8년, 연방상원의원을 8년간 역임한 후 불과 45세에 미국 부통령이 되었다.

고어는 빌 클린턴 대통령 재임시 8년간 미국 부통령을 역임했는데, 미국 정치 200여 년 역사상 드물게 ‘역할이 있는’ 부통령이었다. IT, 환경 등의 이슈와 관련하여 일정한 권한을 행사했고, 성과도 꽤 냈다. 대중적 인기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그의 맞수는 그 유명한 ‘아들 부시’였다.
 
결과적으로 고어는 미국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전제 득표수는 5,100만 표로 부시에게 50만 표나 앞섰지만, 정작 선거인단 수에서는 271대 267로 밀렸기 때문이고, 특히 선거인단수 3위(25명)인 플로리다 주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로리다 주의 개표 절차에서는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67개 카운티 중 팜 비치 카운티 1곳에서만 13,000여 표가 무효표로 처리되었다. 고어와 부시 양측이 모두 291만 표 이상 득표했고 표차는 1,700여 표(0.027%)에 지나지 않는 상황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카운티별로 재검표할 때마다 표차는 900여 표, 500여 표, 300여 표, 200여 표로 줄어들었다.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나라 같으면 인력을 총동원하여 재검표하고 마지막 한 표까지 다시 확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선거제도에는 주 정부가 연방 정부에 해당 주의 개표 결과를 보고해야 하는 마감 시한이 있다. 결국 재검토가 진행 중임에도 미국 연방대법원은 선거 5주 후에 플로리다 주의 재검표 작업을 중지할 것을 판결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537표(0.009%) 차이로 부시가 플로리다 주에서 승리했고,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한국인이라면 찝찝함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그래서 승복한다는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고어는 이에 승복했고, 부시를 당선자로 인정하고 축하해 주었다. 이 드라마틱한 개표 과정은 2008년 ‘Recount’라는 TV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2000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재선에 도전했고, 그 상대는 오바마 대통령 재임시 역시 8년간 미국 부통령을 역임한 조 바이든이었다.
 
트럼프는 2016년 첫 대선 출마 때부터 ‘자신이 패배할 경우는 불법이나 조작된 선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면서, 패배시 승복하겠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다행히(?) 2016년에는 그가 승리했지만, 2020년 그가 패배했을 때 그는 진짜로 선거 결과 승복을 거부했다. 심지어 그는 승복을 거부한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지자들을 선동하여 미국 의사당에 난입하도록 했고, 이 의사당 난입 사태로 5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를 이유로 그는 미국 역사상 네 번째로 탄핵소추되었다. 참고로 세 번째로 탄핵소추된 것도 트럼프이다(2019년, 우크라이나 스캔들).
 
미국 연방대법원이 마지막 대선 불복 소송을 얼마 전 기각했지만, 트럼프는 여전히 선거불복을 외치고 있고, 이미 지지자들로부터 정치자금 1,800억 원을 모금해 두었다. 그는 자신에게 겨눠진 여러 혐의에 대한 수사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승복하지 않을 태세이다. 미국이 분열되던 말던 말이다.
 
왜 선거 패배라는 같은 결과를 놓고 이처럼 고어와 트럼트의 판단이 극명하게 달랐던 것일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뼛속까지 엘리트였던 명문가 출신 고어는 선거라는 민주주의 시스템과 그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무너지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반면 이익과 우적(友敵)이라는 기준으로 평생을 살아온 기업가 트럼프는 선거라는 시스템도 하나의 수단일 뿐이고, 자신에게 불리하다면 적으로 삼아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난 금요일 의협회장 선거의 결선투표가 끝났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위탁되어 관리되었고, 대부분의 투표가 전자투표로 이루어졌기에, 개표 결과는 1시간 만에 확인할 수 있었다. 결과는 알고 계신 바와 같다.
 
그런데 눈을 의심하게 하는 언론 보도를 접했다. 결선투표에서 낙선한 후보가 선거 결과에 불복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해당 후보는 개표 직후 ‘완전한 부정선거이자 강탈’이라면서 승복을 거부하고, 게다가 ‘의협 선거관리위원회는 내 편이 아니기 때문에 힘만 빼는 일’이라면서 의협 선거거관리위원회에 이의제기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며, ‘법정다툼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이유로 소송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대신에 ‘의협에 대항하는 단체를 만드는 것은 물론, 회비 납부 거부운동도 전개할 계획’이라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부정선거에 저항하는 운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결선투표 상대였던 당선자에게 ‘도둑’이라는 원색적인 비난까지 쏟아냈다.
 
다행히 해당 후보는 3일 후 말을 바꾸어 선거 결과에 승복했다. 그러면서 선거 결과 불복을 선언한 것은 ‘선거에서 승리를 확신했기 때문에 개표 결과를 보고 충격을 받았고’, ‘결선투표에서 네거티브가 상당했고,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만약 해당 후보가 위와 같은 사유나 목적에 따라 선거 불복을 선언한 것이라면, 이것만으로는 그가 취한 수단이 정당화되기 어려울 것이다. 단체의 리더가 되려는 사람이 선거 결과에 개인적 충격을 받아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선거 불복을 선언한다는 것은 납득이 어렵다. 또한 네거티브에 대한 문제 제기를 위해, 합의된 ‘게임의 룰’인 선거관리규정에서 정한 절차를 따르지 않고, 선거 불복을 선언하는 것 역시 납득이 어렵다.
 
의협의 대표성을 강화하고 대형병원, 전공의 등의 협력을 얻는다 하더라도 산적한 현안들을 해결하기에는 의협의 역량이 부족한 판국이다. 게다가 백신 접종이 진행되면서 ‘코사의팽(코로나 끝나면 의사를 팽한다)’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협에 대항하는 단체 설립’, ‘회비 납부 거부’를 언급한 것은 그 발언 자체로 의협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선거는 진실로 회원들의 축제여야 한다. 축제를 진흙탕으로 만드는 것은 패배한 경쟁자의 말 한 마디이다. 비온 뒤 땅이 굳어진다는 말처럼, 이번 해프닝이 의협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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