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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뒤쪽이 진실이다’
‘고로, 뒤쪽이 진실이다’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03.30 06: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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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9〉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왜 똑같은 면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걸까? 저마다 나은 면이 있을 텐데...’ 증명사진을 찍을 때마다 작가 하완이 가졌던 의문이다. 그는 중학교 시절 어느 미술 시간의 경험을 소개한다. 옆자리 친구의 얼굴을 그리라는 과제가 주어졌을 때 반 학생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친구의 앞모습을 그렸다. 그런데 한 아이만은 독특하게도 짝꿍의 측면을 그렸다고 한다. 완성된 결과물들을 보면서 다들 깜짝 놀랐다. 이목구비를 평평하게 그릴 수밖에 없는 정면과 달리, 측면 그림이 얼굴의 굴곡을 훨씬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던 것이다. 누구를 그렸는지 콕 집어낼 수 있을 정도의 개인적 특징은 앞모습이 아니라 옆모습이 더 잘 잡아내고 있었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에 이어 두 번째로 내놓은 하완의 에세이 <저는 측면이 좀 더 낫습니다만>에 나오는 이야기다. 하완은 이후로 사람들의 옆얼굴을 훔쳐보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정면에선 보이지 않던 슬픔이나 매력, 혹은 말 못 할 비밀이 측면에서 드러나는 걸 보고 새삼 놀랐단다. 공감이 갔다. 입사 원서나 인사팀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직원들 얼굴 사진을 보면 마치 단일클론들인 양 모두가 비슷비슷하니 말이다. 컴퓨터의 도움으로 점이나 흉터 같은 건 아예 밀어버렸고 눈을 키우거나 턱을 깎는 ‘사이버 성형’도 예사로 해대니, 도대체 증명사진으로 증명할 수 있는 개인의 특징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혹시 서류전형 때 측면 사진을 함께 내라고 한다면 조금은 진실에 더 가까운 정보를 얻겠지만 그것 역시 이른바 ‘뽀샵’의 유혹을 완전히 뿌리치긴 어려울 것 같다.

나는 과거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1년 남짓 사설(?) 투어가이드 노릇을 한 적이 있다. 물론 낮에 가슴에 달고 다닌 명찰에는 ‘UCSD 암센터 소속 방문 연구원(Visiting Scholar)’이란 타이틀이 붙어 있었지만 저녁 시간과 주말엔 가족, 친지, 동창, 직장동료 등등 LA 공항을 통해 남가주로 몰려오는 온갖 방문객들 뒤치다꺼리에 바빴다. 무보수 자원봉사였어도 투어가이드 역할에 충실하려니 어쩔 수 없이 지역 명소들을 공부해야 했고 맛있는 식당들도 수소문해야 했다. 그때 한 가지 좋은 팁을 얻었던 책이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다.

프랑스 파리에 온 사람들은 누구나 큰 숙제가 있다. 개선문, 콩코드 광장, 에펠탑, 노트르담 성당 등등 수많은 명소들을 빠른 시간 내에 둘러봐야 한다는 숙제. 망명 생활 중 실제로 파리에서 택시 운전을 했던 홍세화의 조언은 이렇다.

“담뱃가게에서 사진엽서를 사세요. 택시를 잡은 다음 운전사에게 사진엽서를 보여주시고 그리 가자고 하세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사진에 나와 있는 배경이 목표가 아니라 그 배경을 찍은 장소가 목표 지점이란 거죠.”

엽서의 사진을 찍은 장소들이야말로 파리의 화가들과 사진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찾아낸 곳이니 그 자리에 가서 배경을 ‘뒤통수’로 바라보고 ‘찰칵’하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지나친 증명사진 강박감에 건성건성 뒤통수로만 경치를 보지 말고, 부디 ‘앞통수’로 더 많이 쳐다보란 조언도 빠지지 않았다.

나는 이 방법을 샌디에이고 관광객들에게도 적용했다. 사진엽서와 여행 가이드북에서 멋진 사진들을 추리고 뒷배경이 똑같이 그렇게 나올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을 점검했다. 노을이 깔리는 보석 같은 ‘라호야’ 해안, 동화 나라의 성 같은 호텔 ‘델 코로나도’, 열기구와 패러글라이더가 하늘을 수놓는 ‘토리파인스’ 골프장. 그림 같은 풍광이 펼쳐지는 곳들을 포토존으로 소개하니 손님들은 대만족이었다. 호응이 가장 컸던 곳은 태평양이 사방을 둘러싼 곳에 외롭게 서 있는 ‘포인트 로마(Point Loma)’의 등대였다.

그곳에서 나는 관광객들의 뒷모습을 한 번씩 찍어주었다. 그들이 모처럼 ‘앞통수’로 경치를 감상할 때 가만히 뒤에서 셔터를 누른 것이다. 스페인어 ‘로마(Loma)’는 ‘언덕(hill)’을 뜻한다. 그 언덕길을 내려가는 사람을 뒤에서 카메라 렌즈로 보면 하늘과 바다와 숲이 가로로 3분의 1씩 배경에 깔린다. 그 탁 트인 배경 안에 사람들의 뒷모습을 살짝 얹으면 자연과 벗하며 인생길을 담담히 걸어가는 듯한 호젓한 작품이 완성된다. 이렇게 촬영한 사진을 손님들은 좋아했고 나 역시 이곳에서 아들이 찍어 준 뒷모습을 SNS 프로필 사진으로 오래 걸어놓았다.

뒷모습은 의도적으로 꾸미기가 힘들다. 감정을 드러낼 얼굴이 없기에 오히려 더욱 정직한 속마음이 전해오는 듯하다. 형언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가 한 사람의 어깨와 등에서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처럼, 기쁨보다는 안타까움과 외로움이 도드라지는 게 뒷모습의 특징 같다. 투어가이드 하다가 인간의 뒷모습에 매료된 나는, 작가 하완이 측면 훔쳐보기에 집착했던 것처럼, 앞에 가는 사람들의 뒷면을 유심히 살피곤 한다. 신기하게도 거기에서 ‘뽀샵질’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많은 진실들을 만난다. 

순번을 기다리며 진료실 밖 의자에 앉아 있는 환자의 절박함. 수술장에서 나와 터덜터덜 연구실로 돌아가는 외과 의사의 안도감. 병실 복도에서 커다란 식사 카트를 힘겹게 밀고 다니시는 영양과 아주머니의 사명감. 이 모두가 그들의 뒷모습에서 물씬 묻어난다. 얼굴의 특징을 잡아내기엔 측면이 좀 더 나을지 모르지만, 마음의 특징은 이렇게 뒷면에서 더 생생하게 살아난다. 일찍이 ‘뒷모습’에 천착했던 미셸 투르니에의 말을 기억하자. ‘고로, 뒤쪽이 진실이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에서 연두색 치파오를 곱게 입은 장만옥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싱가포르로 떠날 수 없음에 눈물을 흘린다. 그녀가 앉은 침대 뒤로 두 면을 맞댄 반신 거울이 놓여 있고 거기에 각각 그녀의 옆모습과 뒷모습이 동시에 비친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정면 혹은 측면 얼굴보다 거울에 비친 뒷모습이 진실로 훨씬 더 서럽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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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호 2021-03-30 22:24:48
오늘도 너무나 푹 빠지게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