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릉동 ‘원탁의 기사단’
공릉동 ‘원탁의 기사단’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03.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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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7〉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엑스칼리버를 휘두르던 브리튼의 군주 아서왕은 기네비어 공주와 결혼할 때 둥근 탁자를 선물로 받았다. 거기 둘러앉을 수 있는 인원은 13명이란 설도 있고 100명이 넘는다는 설도 있다. 숫자가 몇 명이건 간에 기사들이 원탁에 앉는 위치는 어디라도 차이가 없었다. 이른바 ‘상석’이 따로 없었다는 얘기다. 뜻도 좋고 유명한 전설의 후광도 있으니 우리 동아리 이름으로 딱 맞겠다 싶었다. 물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것은 우리가 ‘원자력병원에서 탁구를 좋아하는 멋진 사람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이다. 첫 글자의 조합과 약간의 나르시시즘이 빚어낸 자연스러운 연상작용이었다. 하지만 ‘원탁의 기사단’이라 부르는 게 너무 길고 좀 오글거린다는 사람도 있었기에 그냥 우리 탁구동아리는 ‘원탁회’라고 불리게 됐다.

지금은 수십 명 회원이 활발히 활동하는 어엿한 중견 동아리지만 그 시작은 미미했다. 10년 전 어느 날 병원 체력단련실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던 낡은 탁구대를 몇몇 의사들이 발견해서 이따금 일과 후에 복식경기를 가졌다. ‘똑딱이’ 수준의 실력이었어도 치열한 경쟁심이 한번 발동하니까 어떤 복식조는 유니폼까지 맞춰 입고 나타나 허세를 부렸다. 시장에 가서 유니폼 왼편 가슴에 태극마크를 박아넣고는 어설프게 국가대표팀 행세까지 하던 그 시끄러운 팀 덕분에 체력단련실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소문나자 의사뿐 아니라 간호사, 의료기사, 연구원, 행정사무원 등등 여러 부서 직원들이 체력단련실에 모여들었고 정식으로 탁구 동호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스포츠를 통해 직종 간 대화합이 저절로 이루어지니 아서왕의 ‘원탁’ 정신을 구현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졸지에 초대 회장으로 추대된 나는 친목 도모와 실력향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했기에 동기부여를 위해 다른 기관 탁구부와의 교류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때 처음 맞붙은 팀이 중앙대학교병원 탁구부였고 이들은 ‘스매싱’이란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원탁회는 선전했지만 지금까지 역대 전적에서 중대병원 스매싱에 많이 밀린다. 스매싱은 객관적 실력이 우위에 있었음에도 중앙대학교 탁구부 소속 대학생들까지 출전시키는 소위 ‘반로환동(返老還童)’의 신공까지 종종 펼쳤다. 나이가 많고 실력은 좀 처졌지만 우리 원탁회는 원칙과 매너를 중시했으니 그만하면 ‘기사단’으로 불려도 손색없지 않을까.

그런데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게임을 즐긴다’는 일종의 ‘정신승리’에도 한계가 있는 듯했다. 이후로 서울과기대, 삼육대, 고려대, 강남구의사회, 수유리 클럽 등등과의 탁구 대결에서 우리 원탁회는 모조리 패했다. 코로나 유행 직전 출전했던 과기부 장관배 탁구 대회에서는 양 팀의 다섯 개 복식조가 동시에 맞붙는 ‘샷 건’ 방식의 경기에서 KBS에 5대0으로 지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이쯤 되자 누군가 우리 원탁회를 ‘힐링 탁구부’라 부르기 시작했다. 상대방에게 통쾌함을 선사하여 힐링 효과를 준다는 뜻이다. 기사도도 좋지만 계속 이러다가는 라만차의 돈키호테 같은 정신과적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염려가 됐다. 교류전을 잠시 중단하고 우선 내실을 다지기 위해 탁구 코치를 병원에 불러 레슨을 열심히 받기로 했다. 다행히 꽃미남 부류의 젊은 코치들이 지도를 맡으면서 원탁회에 생기발랄한 에너지가 주입됐고 여성 회원들 또한 적극성을 띠게 됐다.

따지고 보면 탁구는 입문하기 쉬운 운동이다. 몇 달 동안 죽어라 스윙 연습을 하고도 필드에 나가 공 한번 제대로 못 맞히는 자들이 수두룩한 골프와 비교해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초보자가 재미를 느끼게 되는 역치가 이렇게 낮은 운동이 또 있을까, 실수했을 때 골프장에서는 탄식과 욕설이 터져 나오지만 탁구장에서는 웃음이 쏟아진다. 게임을 하면서 가장 많이 웃게 되는 스포츠 역시 탁구가 아닌가 싶다. 탁구가 가진 이런 덕목들을 하나하나 음미해보는 것이 교류전 참패로 인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극복의 지름길이란 생각이 들었다.

탁구가 가진 미덕들을 점검해보는 것에 덧붙여 탁구로 인한 보람과 감동을 리마인드 하는 것도 망가진 컨디션 회복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나는 가끔 과거 우리 병원을 찾았던 현정화 감독을 떠올릴 때가 있다. 원탁회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올림픽 대표팀 탁구 감독으로 현정화 선수가 임명됐다. 병원 바로 옆 태릉 선수촌에 현 감독이 출퇴근하는 걸 알게 된 우리 산부인과 선생이 SNS를 통해 원자력병원에 한번 방문해 달라 요청했다. 환자들을 위한 ‘1일 탁구 교실’을 열어달라 부탁한 거였고 현 감독은 흔쾌히 수락했다. 어느 화창한 토요일 오후, 병원 로비에서 어린 소아암 환자들이 환자복 차림으로 현 감독과 탁구공을 똑딱거리며 즐거워하고 유방암 환우회 환자분들은 그 옆에서 환호하며 손뼉 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탁구가 가진 진정한 힐링 효과를 원탁회 회원들이 실감하던 순간이었다. 현 감독의 재능기부에 감동한 우리들은 단체로 현정화, 이분희의 남북단일팀 스토리를 다룬 탁구 영화 <코리아>를 감상하고 왔다.

원탁회에 뒤늦게 가입한 회원들은 원탁회가 그저 ‘원자력병원 탁구 동호회’의 준말인 줄로 안다. 하지만 그 이름에는 평등과 화합의 상징인 ‘원탁’이 들어있고, 이기기 경쟁보다는 고귀한 스포츠 정신을 숭상하는 ‘기사도’가 자리 잡고 있음을 우리 원탁회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물론 나의 일방적인 주장일 수 있지만 원자력병원 탁구 동호회는 ‘원탁의 기사단’으로 불릴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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