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 커피’를 아시나요
‘형광 커피’를 아시나요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03.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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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6〉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시작은 문화평론가 김갑수가 쓴 <작업 인문학>을 읽고 나서였다. 저자에 따르면 ‘태생은 한량인데 어쩔 수 없이 진보 지식인인 척해야 하는 시대상이 갑갑해서’ 솔직하게 한번 써 봤다는 책이다. 표지에 ‘아는 만큼 꼬신다’라는 부제가 붙어있으니 여기서의 ‘작업’은 남성이 여성을 유혹하기 위해 수행하는 제반 노동을 의미한다. 김갑수는 그 유효한 수단으로 ‘커피’와 ‘음악’을 열거하는데 그 중에도 커피를 첫손으로 꼽는다. 커피에 대해 잡다한 지식을 쌓아 대화에 센스 있게 활용하고 나아가 스스로 맛있는 커피를 내릴 수 있다면 이성에게 근사하게 보이는 것쯤은 어렵지 않다고 주장한다.

솔깃했다. 평소 커피를 꽤 많이 마시지만 딱히 ‘이맛이야’ 하고 감탄한 경험은 별로 없던 터라, 커피 내리는 법을 공부해서 직접 한번 만들어 보라는 김갑수의 조언은 잠자던 나의 도전정신을 깨웠다. 몇 해 전 그 비싸다는 루왁 커피를 어쩌다 맛보고서 ‘커피가 좀 구수하네’ 하고 시골 노인네 같은 평밖에 내놓지 못했던 나는 ‘커피잔 안에서 신의 얼굴을 보았다’라는 식으로 고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의 경지가 부러웠다. 물론 ‘작업’ 운운한 김갑수의 이야기도 전혀 영향이 없었다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어쨌건 나는 무슨 바리스타 귀신에라도 씐 사람처럼 커피 드리핑을 위한 각종 서적과 도구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비록 독학이었지만 고3 같은 자세로 이론 공부와 실습을 맹렬히 병행했고 이른바 ‘오타쿠’의 길로 접어드는구나 싶었을 즈음 어김없이 ‘지름신’이 강림하셨다.

가장 먼저 병원 내 방을 장식하기 시작한 것들은 ‘그라인더’ 혹은 ‘핸드밀’로 불리는 원두 분쇄기였다. 볶은 원두를 으깰 때 가장 향긋한 냄새를 맡을 수 있기에 출근하면 커피콩 가는 일이 기분 좋은 아침 루틴이 되어버렸다. 원두의 분쇄 굵기가 커피의 추출 정도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변수라 대부분의 그라인더에는 굵기 조절 나사가 달려있다. 하지만 매번 나사를 돌리다 보면 오차가 생겨서 균일한 맛의 커피를 내리지 못할 염려가 있기에 나는 그라인더를 여러 개 사서 에스프레소 전용으로 매우 잘게 가는 것부터 프렌치 프레스용으로 굵게 가는 것까지 각각의 용도를 고정시켰다. 고백하자면 그거 다 핑계고 세상에 예쁜 그라인더들이 너무너무 많았다는 게 진짜 이유다.

비슷한 사연으로 여러 종류의 드리퍼(칼리타, 하리오, 고노 등)와 다양한 필터들(종이, 헝겊, 메탈 등) 그리고 온갖 컵, 텀블러, 주전자 등등이 내 방을 채우기 시작했다. 정통 핸드드립과 분야는 조금 다르지만 사랑스러운 모카포트들 역시 눈에 띄는 족족 사 모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변의 간곡한 만류가 없었다면 각종 로스팅 기구들까지 들여왔을 참이었다. 커피 볶는 기구인 로스터까지 사서 직접 로스팅도 불사할 심산이면 아예 결혼생활을 재고해야 할 것이란 조언이 마음에 걸려 그것만은 간신히 자제했다.

커피 맛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는 원두의 품질이다. 따라서 커피용품에 대한 나의 열정은 금세 다양한 커피 원두를 테스트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파나마 에스메랄다 농장의 게이샤, 엑스트라 팬시 등급의 하와이언 코나, 자메이카 마비스 뱅크에서 나오는 블루마운틴 넘버 원... 이름 좀 있다 하는 스페셜티 커피들이 속속 병원으로 배달됐고 나는 그것들을 내려 마시면서 꽃향기가 어떻고, 산미는 어떻고 또 균형감은 어떻고 하면서 동료들과 어쭙잖은 품평을 즐겼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내린 커피의 맛이 다른 바리스타들과 비교하면 어떤 수준일까 하는 생각에 주변 카페들 순례에 나섰다. 잘 알려진 프랜차이즈 커피숍들 말고 장인정신 충만한 주인이 정성껏 손으로 내린 커피를 제공하는 그런 카페들 말이다.

그 순례의 길에서 종착점처럼 만난 카페가 병원 근처의 ‘형광 커피’였다. 테이블이 세 개 남짓 있고 종업원 없이 젊은 총각 사장님 혼자서 운영하는 작은 커피숍이다. 카페 간판에 발광하는 원두를 그려놓았기에 어쩌면 커피에서 영롱한 빛이 피어나는 장면을 볼 수 있겠거니 기대하며 가게에 들어섰다. 실망스럽게도 ‘형광 커피’의 ‘형광’은 특정 물질이 전자기파 같은 걸 흡수해서 오묘한 빛을 내는 화학 현상이 아니라 그냥 사장님 이름이었다. 하지만 말이 없고 수줍은 성격의 ‘이형광’ 사장님이 직접 볶은 원두로 내려주는 커피는 내 입에 꼭 맞았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농장 원두들 몇 개만 준비해 놓았음에도 그분의 손길이 닿으면 그 콩들이 최고의 커피로 변하는 게 신기했고 그간 어설프게 전문가 흉내를 내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느끼게 해 준 그분의 커피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넘치지 않음’이다. 로스팅도 추출도 과하지 않고 커피잔조차 소박한 흰색. 게다가 커피에 관해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지닌 사람이 태도까지 겸손하다. 당연히 이형광 사장님과 그분의 커피에 매료된 우리 병원 직원들이 많이 생겼고 그 때문인지 형광 커피는 8년째 같은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다. 나는 주로 사장님이 볶은 에티오피아나 과테말라산 원두를 사다가 병원에서 내려 마시지만 가끔은 점심시간에 직접 가서 사장님의 핸드드립 솜씨를 맛보고 온다. 그때마다 가게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커피와 함께 담소를 나누는 우리 직원들을 마주치곤 한다.

새삼 깨닫지만 ‘고수(高手)’의 특징은 감정기복 없는 집중력과 ‘업(業)’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이다. 잡다한 눈요기용 커피용품도 없고 유명하고 값비싼 원두도 없는데 형광 커피 사장님은 수수한 도구와 재료로 한결같이 맛있는 커피를 내린다. 솜씨 자랑을 할 법도 하건만 그저 자기 커피를 즐겁게 마시는 손님들 표정에서 조용히 보람을 느끼는 것 같다. 적어도 김갑수가 말한 ‘작업 도구’로서의 커피는 형광 커피 안에서 발붙일 곳이 없다. 형형색색의 형광은 없지만 분명 그 커피엔 서로의 마음을 타고 따뜻하게 번져가는 또 다른 형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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