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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투사의 예의, 변호사의 예의
검투사의 예의, 변호사의 예의
  • 전성훈
  • 승인 2021.02.23 09:5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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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11)
전 성 훈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 성 훈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검투사(gladiator)라고 하면 십중팔구 2000년작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떠올릴 것이다. 이 영화는 에일리언, 블레이드 러너, 델마와 루이스, 블랙 호크 다운, 마션 등을 연출한 거장 리들리 스콧 경(Sir)의 작품이다.

충직하고 용맹하여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총애를 받는 최전선 군단장 막시무스(러셀 크로우 분)는, 제위를 탐내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가 된 콤모두스에게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잃고 도망친다. 생사의 기로에서 마치 운명처럼 검투사가 된 그는, 로마로 돌아오게 되어 탁월한 실력으로 단 두 번의 검투사 경기만에 최고의 인기검투사가 된다. 보고받은 것과 달리 막시무스가 살아있고 로마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음을 알게 된 콤모두스 황제는, 그를 검투사 경기에서 직접 죽여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고 한다. 막시무스는 비열한 방법까지 동원한 콤모두스를 경기장에서 당당히 쓰러뜨리고, 콤모두스의 어린 조카로서 다음 황제인 루시우스에게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뜻이었던 공화정으로의 복귀를 요청하고 검투사로서 숨을 거둔다.
 
이 영화는 로마 검투사의 일반적 이미지를 바탕으로 영웅의 몰락과 부활을 흥미롭게 그려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로마 검투사에 대한 상식은 사실과 일치하는 것도, 아닌 것도 있다. 일단 검투사들이 탁월한 일대일전투능력을 가졌고 큰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검투사 경기에서 패하면 패자는 무조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로마가 끊임없이 침략전쟁을 벌리던 공화정 초기에는 전쟁포로(=노예)의 공급이 끊이지 않아 ‘데스 매치’가 자주 열렸는데, 이때에도 하루 평균 100명 정도의 검투사들이 경기를 벌여 20명 정도가 사망했다. 즉 80% 정도의 검투사들은 살아남아 다음 경기를 준비했던 것이다. 게다가 침략전쟁이 거의 없어져 노예가 귀해진 공화정 중기로 가면, 몇 년간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뒤 경기에 나서는 검투사들은 함부로 죽게 할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그래서 검투사 경기의 룰은 ‘someone must fall’에서 ‘first blood’로 변경되었다. 즉 상대방의 몸에 피가 나는 상처를 먼저 입힌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이전보다 경기가 시시해져서일까. 검투사 경기는 인기가 수그러들다가, 기독교를 로마 국교로 선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에 이를 금지하는 법이 만들어지면서 차츰 소멸되었다.
 
기본적으로 검투사는 타인의 재미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직업이다. 같은 양성소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함께 훈련하던 동료를 죽여야 할 때도 잦았던 그들에게는 나름의 ‘검투사의 예의’가 있었다. 그것은 상대방이 비열하거나 비겁한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니라면, 승부가 결정난 후에는 상대방을 빠르고 깔끔하게(quick and clean) 죽인다는 것이다. 목을 치거나 심장을 찌르는 것은 최선을 다해 정정당당히 싸운 상대방에 대한 예우였다. 만약 비열하거나 비겁한 상대였다면 복부를 찔러 천천히 죽게 만들었다. 이는 저승길이라도 편안히 가라는 마지막 선물이거나, 편히 죽을 자격도 없다고 꾸짖는 사적 보복이었다.
 
변호사 역시 법정이라는 경기장에서 법리와 증거를 무기삼아 상대방과 싸우는 일종의 검투사이다. 심판이 있고, 승패가 있고, 승자에게는 찬사와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따른다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패자가 목숨을 내놓을 필요가 없다는 것은 다르다. 비록 패한 변호사는 심한 열패감과 자괴감으로 한동안은 머리감다가도 머리를 쥐어뜯지만 말이다.
 
사법절차의 검투사들로써 서로 싸우는 것이 숙명인 변호사들끼리도 나름의 ‘변호사의 예의’가 있다. 첫째는 상대방의 주장은 공격해도, 상대방측 변호사 개인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상대방의 주장은 사실과 다릅니다’라는 식으로 공격할 수는 있어도, ‘피고측 대리인이 법정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불필요하게 상대방측 변호사의 업무를 가중하는 절차적 주장은 자제한다는 것이다. 이는 타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자존감을 걸고 싸우는 일종의 용병인 변호사들끼리 서로를 배려하던 암묵적인 합의였다. 물론 최근 들어서는 과거의 예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는 사회상 덕분인지, 재판 전후에 서로 가볍게 인사하던 기초적 예의는커녕, 당황하거나 황당하게 만드는 상황이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지난 18일 의료인이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으면 의료인면허를 취소하는 내용의 의료법 개정안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했다. 이는 2000년 개정을 통해 의료인 면허결격사유의 대상범죄를 의료법 등 보건관련법률위반으로 제한하여 직무관련성을 요건으로 삼고 있는 의료법을 20년 전으로 다시 되돌리는 개정안이다.
 
의료인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고 환자의 신뢰를 받고 있고, 받아야 하는 직군이므로 면허결격사유의 대상범죄를 중범죄(살인, 강도, 성폭행 등)로 확대한다고 하면, 적어도 그 취지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번 의료법 개정안은 교통사고와 같은 과실범의 경우에도 예외 없이 면허결격사유의 대상범죄로 삼고 있다.

이는 ‘형벌은 그 행위 자체에 대한 비난으로 그쳐야 하고, 사회방위적 목적을 위한 최소한의 범위 외에는 사회활동에 제한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반한다. 의사가 교통사고로 사람을 사망케 했다고 그의 면허를 취소하는 것이 과연 사회방위에 도움이 되는가?
 
죽자고 싸우는 변호사 사이에서도, 그리고 정말로 목숨 걸고 싸우는 검투사 사이에서도 최소한의 예의는 서로 지켰다. 그런데 정부가 코비드-19 백신 접종을 위해 의료계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고 있는 시점에, 그리고 작년의 대타협으로 구성된 의정협의체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음을 장관도 인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회는 의료계의 뺨을 때리는 법안을 의료계에 들이밀었다. 세상사 그 어떤 행동도 TPO(time, place, occasion)에 맞지 않다면 예의가 아니다. 코비드-19 백신의 전국민 접종을 앞둔 시기에, 정부와 의정협의체 운영을 합의했음에도 의원발의 입법으로, 의료계의 충분한 의견수렴도 없이 진행하는 이번 입법 시도는, 비록 국회의 입법권 내라고 하더라도, 의료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지 않은 것이다. 부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라도 상식적인 논의가 이뤄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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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상 2021-02-23 19:12:40
존경합니다 전성훈 변호사님. -어느 내과 의사 올림-